잡식하마에서 일단 Job-Seek(ing)은 삭제하게 되었다.

이것저것 내 좋은대로 보고 듣는것은 여전하니 雜食은 유효하다.

그럼 이제 다시 이것저것 씨앗을 뿌리고 심어보는 雜植 하마가 되어야 할 때인가.

무료하게 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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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각주:1]/1/23

 살 것 : 알코올4L

 할 것 : 집주인 전화(샤워기)

 

2003[각주:2]/2/11 생각정리

 

1.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

 진짜 꿈을 찾기위해

 라디오 피디!(저널리스트)

 

2. 행정직 일이 안 맞기 때문

 

3. 조건이나 급여 때문은 아님

 

4. 이대로 현실에 순응하고 도전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습관을 버리려고

 

 

----------------

 

윤하 - hope

KBC[각주:3] 1  라디오 - HLKA

※명의 이전 문제

부동산 문의

 

484-6239

 

디지 길레스피 unicorn

브로콜리 너마저 - 울지마

재주소년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1. (분명히 2013년의 오기) [본문으로]
  2. (분명히 2013년의 오기) [본문으로]
  3. KBS의 오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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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원 피부과

2. 책 반납

3. 복사 이야기하기

4. 토익 공부 1시간

5. 운동 1시간

6. 글 1, 기획안 1
7. 신문 키워드 정리

8. 방송학 1시간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 오라>

<생존의 비용>

<작은 것들의 신>

이인성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1/23

1. 상식 정리

2. KBS 9뉴스 확인

3. 글 정리˙축약

 

저널리즘의 기본원칙(3판) 구입

공영방송 1~4권 -> 중앙도서관으로

 

 

Wishlist

 

<만들어진 현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이강룡, 유유

<百의 그림자> 황정은

<어루만지다> 고종석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인 것 같다. 물론 그 전에도 그 나이 때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가수나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진심으로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느꼈다. 그때는 나름 진지해서 매일 매일 시간을 내서 그림을 베껴 그리곤 했다. 당시의 내 유일한 삶의 재미는 다섯시 무렵쯤 하던 티비 만화영화를 보는 것과 도서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보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놀거리도 없었다.

 

만화 속 세상은 현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재밌고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어쨌건 현실이 재미없으니까 만화속에 더욱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서 만화책을 베껴 그리기를 1년 정도 했던 것 같다. 어느정도 그림을 따라 그리는 건 익숙해졌지만 그 이상 발전이 없었다. 나름 나만의 캐릭터도 그려보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흥미가 점점 사라졌다.

 

그때까진 난 학교수업은 대충 따라갔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였다. 말도 별로 없고 해서 아이들은 나 보고 착하다고 했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은 그런 아이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갈림길이 생겼다. 학교에서 매월 수학시험을 쳐서 반을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 난 수학을 못해서 걱정이 많았고 어머니는 나를 수학학원에 보냈다. 그런데 생각보다 성적이 너무 잘 올랐다. 거의 매번 백점을 맞았으니. 아이들은 다들 나를 부러워했고 선생님도 나를 칭찬했다. 그때 공부에 대한 나의 관점이 확립된 것 같다. 별 볼 일 없다고 느꼈던 나의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가 공부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의 꿈은 수학 교수로 바뀌었다. 수학이 워낙 재밌기도 했고 또 수학교수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볼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고3때도 안 그랬는데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누가 깨우지도 않는데 아침에 한시간씩 일찍 일어나 수학문제집을 풀다 학교에 가고 했으니 말이다. 내 생애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기다.

 

그러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집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학원도 그만두고 여러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았다. 그때 순간 공부에 대해 잠깐 회의가 들었다. 열심히 해봤자 이모양인데 뭐하러 아둥바둥할까. 그럼에도 공부는 내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었기에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은 열심히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다. 수학을 꾸준히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고등학교때 이과를 갔을테고 지금 내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쓸데 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수학교수라는 꿈은 그 때 접었다.

 

아무튼 사춘기 때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 삶에 대해 좀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항상 좀 어둡고 자신감도 떨어지고 그런 상태로 학창시절을 내내 보냈다. 그렇게 별 꿈없이 살다가 고등학교 때 다시 꿈이 생겼다. 당시에 사회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상당히 사회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책들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나도 이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강준만의 책도 그때 처음읽었고 리영희의 책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에 그저 정치외교학과에 가면 이런저런 사회에 관한 연구를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대학에 가면 이 힘든 일들도 다 사라지고 행복이 펼쳐지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고3때 막판 또 여러가지 일들로 공부를 제대로 안해서 결국 원하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그에 못지 않은 대학교에 운좋게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내가 상상하던 신세계 따위는 없었다. 내 열등감이 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 별로 없었다. 대학에 오니 다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애들이었기에 내 자존심을 지켜주던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처지와 다른 아이들을 비교하게 되고 열등감이 더욱 커졌다. 나는 학교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거의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읽는데 시간을 대부분 보냈다.

 

다시 꿈이 사라졌다. 뭘해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1년을 휴학하고 군대에 왔고 제대해서 다시 휴학을 했다. 결국 입학한지 4년만에 다시 복학을 했다. 그리고 다시 몇년이 지났다. 지금은 나의 열등감을 조금씩 극복해가면서 내가 진정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찾고 있다. 한번에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도전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다. 마음이 안정되니까 균형도 잡혀가는 것 같다. 더 치열하게 살면서 내 꿈에 대해 고민해야겠다.


201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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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역시 블로그에 내 모든 걸 열어놓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 글에 적힌 건 대략적으로 사실이지만,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제외했으니까. 특히 마지막 문단은 더 그렇다. 2011년 말부터는 지금 준비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데 이 글엔 그 이야기가 없다. 나 역역시 소극적인 방법으로 나를 감추고 있었다. 물론 기억력이 신뢰할 만한지 단언할 수는 없다.


이 길에 들어서기 전에 여러 사람들의 영향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너 그거 해봐라고 말해준 건 아니다. 대학3학년이던 2011년, 친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그 얘기를 했다. 카페도 아직 기억난다. 난 그에게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지만 길이 너무 불투명하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친구는 힘들겠지만 재미있을 거라고 했고. 그때 이미 남에게 얘기했다는 건, 중요한 발언을 위해 오랜기간을 고민하는 내 성격에 비추면, 그 고민은 훨씬 전부터 했다는 거다. 같은 해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친구가 했던 말도 기억한다. 모 공영방송의 공개방송을 같이 보고 헤어지던 길이었다. 그 일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내 말에, "도전해봐요. 하고 싶으면." 이란 짧은 대답을 남겼다. 근데 그 말을 듣고 정말 내 생각이 변했다. 정말 해보고 싶은데 왜 떳떳이 밝히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많이 바뀌게 됐다. 


지금에 비하면 행동하기 전에 훨씬 더 많이 고민했다. 대략 2년 정도 고민하고 직접 뛰어들게 되었구나. 긴 건지 짧은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뛰어든지도 거의 2년이 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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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이란 게 있을까. 그런 건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살았는데. 그를 다시봤을 땐 정말 기뻤다. 내가 물론 그런 티를 은근히, 아니 꽤 풍기긴 했지만. 그리고 그가 직접 연락해 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두마디라도 옆에서 거들지 않았을지 기대도 했고. 그 뒷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가 화나 있지 않았을까 걱정했고, 인사를 하고 나서도 표정을 유심히, 몰래 부지런히 살폈다. 다행히 말과 표정에서 아무렇지 않다고 내멋대로 읽어내긴 했지만. 그렇지만 다시 보는 것만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난 그 모임을 내 앞날 고민 때문에 그만 뒀고. 앞날 걱정 때문에 다시 들어갔다. 내게 가장 절실한 건 역시 다른 데 있다.


여전히 순간순간 그 사람이 걸리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그 역시 나 못지 않게 앞날 고민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다. 고민의 향방에 따라 우리의 만남도 곧 어긋나겠지. 그런데 계속 무언가 긍정적인 그림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다.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숙명일까. 아직 아무것도 아닌 가는 끈에 왜이리 신경쓰고 있을까.


먼저 도착한 테이블에서 그와의 짧은 대화는 재밌었다. 난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모습 보기 좋았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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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냥 떠돌까 하다가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대림역에서 멀지 않았다. 대림역 출구를 나서자 마자 이곳에 내가 온적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3년 전 학교의 모 포럼(이라 쓰고 동문모임이라 읽는다)에서 장학금과 멘토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멘토였던 선배는 대림역 근처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와 더불어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과 함께, 그 사무소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던 기억이 났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할까. 난 그때 고시를 준비한다고 나를 소개했던가. 왜 이리 먼 옛날 같은건가.


지금껏 간 도서관 가운데 제일 아담하다. 작은 걸로 치면 개포도서관보다 작은 것 같다. 고층 빌딩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오래돼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무척 깔끔했다. 내부 개축을 한지 얼마 안 되는 듯하다. 아담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은 게 마음에 들었다. 종합자료실은 테이블이 중앙에 따로 있지 않고 벽에 붙어 줄지어 있다. 마치 대학도서관 처럼 말이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 같다.


종합자료실 신착도서 코너를 훑어봤다. 괜찮아 보이는 책이 많았지만 지금 읽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발견한 책 한 권. <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 벽과 바로 마주한 좁은 테이블에 앉아 그 책을 열어봤다. 저자는 히로세 코지로, 일본 출신의 시각장애인이다. 어린 시절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 전맹이 된 사람이다. 그는 오롯이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성장기와 직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어체로 쓰였기 때문에 읽기도 쉬웠다.


시각장애를 향한 편견에 맞서던 사춘기 시절 일화, 어쩔 수 없이 벽을 느낀 대학 시절 이야기 모두 재미 있었다. 지금은 일본 국립박물관 직원으로서 만지는 전시회를 기획하는 모양이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내가 시각장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음악 때문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들이 공교롭게도 시각장애를 갖고 있었다. 시각장애에 대한 내 관념적 이해는 2년 전 어떤 소년을 만나서 조금 현실감을 찾았다. 실력도 모자라는 내가 그 친구를 가르친 게 좋은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친군 이제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나. 끝까지 꿈을 이루어가길 빈다.


구로도서관의 백미는 4층의 휴게실이다. 4층 한 켠은 카페다. 언뜻 본 메뉴는 그리 싸 보이진 않았다. 그 옆으로 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이 나온다. 다른 도서관처럼 테이블과 의자를 잔뜩 갖다 놓지 않아서 매우 한적하다. 작은 의자 4개가 벽에 붙어 있을 따름이다. 4층 높이지만, 비교적 상쾌하게 주변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공부하다 바람 쐬러 나오면 기분전환은 확실할 듯하다.


도서관을 나와서 바로 대림천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지 않고 좀 어둑한 것이 청계천하곤 또 다르다. 이대로 한참 걸으면 밥 때를 놓칠 것 같아 조금만 걸으려 했다. 걷다 보니 아쉬워 다음 출구까지 미뤘다. 그러다보니 밥때를 결국 놓쳤다. 근처에 있던 용김밥에서 김밥 한 줄과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오므라이스 영 아니다. 더부룩한 배를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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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할 때 걷는다. 걷는 행위가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냥 리듬에 맞춰 걸으면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막상 걷고 돌아오면 해결된 게 없으니, 남들이 보기엔 시간낭비일 것이다. 그래도 걷는다.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내 나름의 방책이다.


어제 강동도서관에 간 것은 그래서다. 물론 반납일자가 다가온 책을 돌려줘야 했고, 마침 책에 집중하지 못할 일이 생겨서 다른 도서관에서 빌렸던 것들도 다 갖다 주기로 했다. 그래서 동대문도서관을 거쳐, 강동도서관으로 갔다. 사실은 동대문도서관 주변 지역도 잘 모른다. 그러나 강동보단 더 자주 지나친 지역이라 생경한 기분을 느끼기엔 부족했다. 260번 버스를 타고 신설동에서 내려 동대문도서관에 책 몇권을 반납했다. 다시 청량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왕십리로 가 5호선으로 환승했다. 다행히, 상일동행 열차가 바로 왔다. 지난번에 마천행을 타서 삽질을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길동역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골목은 시끌벅적했다. 저번과 달리 시장의 끝 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생선 비린내 대신 각종 채소 가판대, 반찬 가게가 나를 먼저 맞이한다. 같은 월요일에 들렀고, 시간도 두세 시간 밖에 차이가 안 났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도 있구나. 좁은 길에서 물건에 눈 팔린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도서관 건물로 향했다. 유독 호떡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열 명 가까이 옹기종기 모여 호떡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맛이라도 있는 건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걷다보니 다시 그 생선가판대가 보인다. 그 건너편으로 수박과 각종 과일들도.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가, 생선 비린내가 그때만큼 진동하지 않는다. 책 구경이 목적이 아니기에, 도서관 직원에게 책을 건넨 뒤 자료실 안을 한 바퀴 휭 돌고 나왔다. 다시 봐도 아담하다. 4층 휴게실에 꼭 가보자고 다짐했기에 계단을 밟았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 그랬는지 4층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들어와서 보니, 이 휴게실은 두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안쪽은 유리벽으로 막혀있고, 바깥쪽은 외부 공기가 통하는 곳이다.


안 쪽 테이블에 잠깐 앉았다. 환기가 잘 안 돼 오래있기엔 힘들듯 했다. 예전 일기장을 읽었다. 일기장이래 봤자, 군대 전역하기 전부터 쓰기 시작한 몇 편이 담긴 작은 공책이다. 초반에만 꾸준히 썼을 뿐 그 이후론, 몇 달에 한 편 쓰는 꼴이다. 그래도 예전 글을 읽으면 지금 고민에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렇다. 지금 내 인생에 관한 중요한 어떤 글을 써야 한다. 그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환기 안 되는 휴게실은 별 도움이 안 됐다. 바깥 휴게실이 궁금했다. 문을 열자마자, 확연히 다른 공기의 질을 느낀다. 옥상에 작은 원형으로 패턴을 이루며 뚫린 철제 구조물로 벽을 쳐놓았다. 그 나름 시원하긴 하지만 작은 사이사이로 밖을 바라보는 게 영 거슬렸다. 


시원한 공기에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군복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그의 온 얼굴이 뻘쭘함을 표현한다. 곧 그의 옆에 깊숙이 숨어 앉은 여자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예비군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짧은 머리에 개구리마크 없는 전투모를 보니,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상근예비역인가 보다. 상병인지 병장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둘은, 공기 잘 통하는 휴게실에서 사이좋게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방해하기가 싫어 다시 나왔다. 아니 방해받기가 싫어서 나왔다. 어딜가든 이놈의 년놈들이 있다. 지난 토요일 서울숲의 악몽이 떠오른다.


현관문을 나서자 오른편으로 꽃밭이 보였다. 붉은 색 꽃을 피운 키가 큰 식물이 인상적이었다. 혹시 요즘엔 꽃사진을 검색하면 이름을 알려주는 어플도 있지 않을까. 왠지 있을 것도 같다. 다시 눈을 밖으로 돌렸는데 간판이 보였다. 3층 정도 높이에 위치한 ‘봄치과’ 간판. 봄치과라 꽤 인상적인 이름이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시장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요리조리 사람을 피하며 호떡집 앞으로 도착했다. 500원 짜리 호떡을 하나 사서 손에 쥐고 다시 걸었다. 보통 호떡보다 꽤나 두껍다. 베이킹파우더를 잔뜩 넣었으려나. 속이 안 익었을까봐 걱정했지만, 잘 부풀어 익어 있었다. 아무튼 맛을 평범했다. 


호떡을 먹고 걷는데 ‘이내과’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세 글자로 병원 이름 짓는 게 흐름인가. 시장 골목을 지나 다른 골목에서 곧 길치과를 발견했기에,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다. 걸으면서 내 진짜 목적이 시작됐다. 길동역을 일부러 지나쳐 골목으로 쭉 걸었다. 걷다보니 신명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온다. 그냥 평범한 학교들이다. 별생각 없이 계속 거닐었다.


다시 큰 길이 나오자 그 길을 따라갔다. 그냥 주위를 둘러봤다. 걷는 사람을,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람, 달리는 차, 은행나무를 봤다. 은행나무에 벌써 파란 은행이 맺혀있다. 벌써 올해도 그만큼 기울었구나. 자연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제일 쉽게 알려준다. 얼마 있으면 그 은행이 누렇게 익고, 땅으로 낙하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발들에 채이고 밟혀, 구린내를 힘껏 발산하겠지. 나도 이번에는 은행보다 더 크게 진동하고 발산할 거다. 물론 구린내 아니고 향기를. 사실 은행나무보다 길가에 줄지어 선 버즘나무가 더 싱그러웠다. 항상 그 나무의 이름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찾아봤다. 다시 잊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지하철 역 세 개를 지나쳤다. 지하철 노선도를 언뜻 떠올렸다. 나는 상일동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상관없다. 막 걷는 게 목적이니. 두 정거장 만 지나면 종점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막 걷는 여정이다. 중간에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버렸다.


길을 꺾자마자 보인 건 롯데 캐슬이었다. 지나온 거리와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그 때 내 발도 피로를 호소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롯데캐슬앞에서 전복을 파는 이동 차량이 보였다. “전복이 한 마리에 500원, 크기는 잘지만 맛은 끝내줍니다. 롯데 캐슬 주민 분들은 00동 앞으로 나와서 구입해 가시기 바랍니다.” 명일역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그 전복 파는 차를 지켜봤다. 사람들이 속속 모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아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날카로운 경계선이 드러난다. 난 잘 모르겠다.


그렇게 집에 왔다. 정리된 생각은 없었고, 그냥 돌아다니면서 잡다한 생각만 더한 걸음이었다. 그래도 발의 피로에 반비례에 내 걷기욕구가 충족됐다. 그냥 본능적으로 걸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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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도서관이라고 부를 만 한 곳에 갔다. '부를 만 한'이라고 표현한 건 이유가 있다. 보통 말하는 도서관이랑은 달랐다. 학교 안 특별활동실을 개조해 만든 '독서실'은 교실 1개 정도의 크기였다. 벽을 따라 서가가 서 있고, 중앙에는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그 안에서만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외부대출은 불가능했다. 초등학교가 끝나갈 무렵에는 새마을 문고에 다니기 시작했다. ‘동사무소’ 지하 일부를 터서 만든 곳이었다. 그곳은 냄새로 기억된다. 오래된 지하의 곰팡이 냄새.


본격적으로 도서관이라 할 만한 곳에 간 건 고등학교 때다. 중랑도서관. 내가 그곳에서 처음 빌린 날은 2003년 10월 4일. 그곳엔 그 이전에도 두어 번 갔으나 책을 빌린 적은 없었다. 처음 빌린 책은 강만길의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그리고 도저히 저자와 출판사를 추측할 수 없는 <신소설>이란 책이다. 대체 이 책은 뭐고 왜 빌렸을까. 아무튼 내 기억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모두 도서관 홈페이지 대출정보에서 가져왔을 따름이다. 공공기관에 내 기록이 남아있는 게 꺼림칙할 때가 많지만, 이것만은 예외다. 이 대출정보 덕에 내가 당시에 무엇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뿌옇게나마 떠올릴 수 있으니.


당시에 나는 사회를 보는 진보적 시각에 관심이 많았다. 강만길의 책도 그래서 빌렸을 거다. 지금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진보와 민족주의가 뒤섞인 관점으로 한국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을 그 뒤로도 얼마 간격을 두지 않고 두 번이나 더 빌린 것을 보니, 그리 쉬이 읽은 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는 아무래도 국사 공부 때문에 빌렸을 거다. 이 책 역시 제대로 보진 않았을 테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가며 봤을 거다. 아 그렇다면 <신소설>은 무얼까. 언어영역 공부 때문에 빌렸던 걸까. 대출이력에 뜨는 책 제목이 책 정보와 링크가 안 돼 있어 알 수가 없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뜨는 게 없고.


중랑도서관은 그간 초등학교 독서실, 새마을 문고처럼 영세한 곳만 다니던 내게 신세계였다. 일단 앞서 말한 곳들과 비교도 안 되게 컸고(물론 상대적이었지만), 대출 시스템도 더 편리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반납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편했던가. 별로 이용하지 않았지만, 컴퓨터실이나 열람실도 있었고 말이다. 한동안 중랑도서관을 자주 애용했다. 대학교 입학하고 큰 도서관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 보면 이 도서관은 그리 크지는 않다. 총 자료 21만 5천여 개, 도서 자료는 그 중 18만여 권이다. 다른 구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과 비교하면 중간은 가는 듯하다.


여느 도서관보다 이곳이 정겨운 이유는 비교적 어릴 때부터 다녔기 때문이다. 집에서 그리 가깝지는 않아도 비슷한 규모의 도서관 가운데 가장 가깝다. 집 앞에서 한 번에 가는 마을버스가 있기 때문에 가기도 편하다. 이 버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은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가끔 심심할 때는 그곳까지 걸어가기도 한다. 빨리 걸으면 삼사십 분 좀 넘게 걸린다(난 상당히 빨리 걷는 편이다). 그리하여 내 주거지와 동선에 큰 변화가 없는 한, 중랑 도서관 이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고등학생 때처럼 자주 가진 않는다. 이젠 수많은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게 취미가 됐으니. 그래도 여전히 가장 친숙한 도서관은 중랑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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