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네 권의 시집은 지난 7월 17일 정독도서관에서 빌렸다. 갑자기 시 바람이 불어 무리해 버렸다. 원래는 한 권씩 감상을 올리려 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도매금으로 쓰게 됐다. 그 말인 즉슨 이 글은 조금 허접스런 글이 될 거란 얘기. 읽은 것들은 반드시, 아니 웬만하면 기록으로 남겨보자고 마음 먹었기에 글의 '낮을 밀도'를 스스로 용서하기로 한다.


1. <화사집>. 너무도 유명한 서정주의 시집이다. 쉽게 읽히는 시도 있었지만, 대체로 해설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화상'같은 대표시는 고등학교 때 지겹게 들어서 문제없이 읽었다. 인상적인 표현이 너무 많지만, 역시 백미는 마지막 두 행이다.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뭘 좀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대단한 표현이다. '문둥이'도 짧고 임팩트 있다. '해와 하늘 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내가 빌린 것은 2001년 문학동네에서 낸 책인데, 서두에서 1941년 남만서고에서 간행된 초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당시의 한글표기법을 따르고 있고, 한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래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튼 한 번 읽어 본 느낌으론 모르겠다. 한국어 시의 최고봉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엔 내 독해가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2.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먼저 읽은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무척 좋았기에 기대한 시집이다. 그의 시집을 발매순으로 읽었다면 좋겠지만, 이미 뒤죽박죽이 돼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도 위로가 되는 시들이 많다. '긴말하기 싫다' 같은 시. '그냥 멍청한 것/그냥 삐뚜름한 것/그렇다면 그냥 견딜 만한데/멍청하고 삐뚜름한 것, 아!/찌르륵 거울에 금이 간다/쩍 갈라져 뒤집어질 것 같다//어쩌겠니, 내가/어제 오늘 못생겨진 것도 아니고……/항상 이렇게 생겼었다는 것이/위로가 되다니!'


시집의 표제작인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사랑스러운 시다. '비가 온다./내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비가 온다구!/…' 이 구절이 특히. 내게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이유도 없이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지금도?). '…/비가 온다구!/나의 소중한 이여./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누군가 내게 이유없이 그렇게 연락해도 기쁠 것 같다(기쁘다). 그밖에도 좋은 시들이 많다. 


3. <입 속의 검은 잎>, 너무도 유명한 기형도의 시집이다. 얼마전 서점에서 봤을 땐 거의 80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내가 빌린 건 2004년에 발매된 35쇄본이다. 예전에 <시인 열전>에서 본 이사람의 인생이 매우 흥미로웠기에,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집이기에 빌렸다.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동시에 성찰적인 내용이 많다. 시들의 풍경묘사가 하나같이 인상적이다. '조치원' 같은 시가 특히. 


이 시집의 시들이 사랑받는 건, 아마도 (영원히) 젊은 시인의 외로움과 방황의 정서가 보편성을 갖기 때문일 거다. 섣불리 확신내리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공명할 빈 공간을 남기기 때문이 아닐까. 


4.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1982년 생, 젊은 시인 오은의 두 번째 시집이다. 넷 중에 가장 언어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시집이다. 정제된 말장난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찬공'에선 그 유희가 비교적 무거운 고민을 이끈다. '찬 공은 둥글다 내가 찬 공은 둥글다 둥글었다 확실히 둥글었다 저만치 날아가서 아직도 둥근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희망'에서는 그 말장난이 따스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됩니까?/생물이 됩니다. 움직입니다./생물은 어디로 움직입니까?/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생물이 생물을 위로하기 위해/위로, 위로, 더 위로…' 인간적인 말장난(내가 꿈꾸는)의 연속이다. 그밖에도 시집에선 다양한 사물과 단어에 대한 탐구가 끝을 모르고 계속된다.


5. 시는 읽을수록 제맛이라는데, 이번에 본 시집들은 나중에 다시 반복해서 봐야겠다. 당분간 바빠지겠지만 꾸준히 시는 읽어야지.

황인숙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고종석의 추천을 보고 무작정 빌린 시집이다(그는 이 블로그 속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한 작가일 게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에 관심을 두었던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내 나름대로 시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인열전>이란 시평집도 산 적이 있는 걸 보면(이 책은 곰팡이 슬다 만 상태로 아직도 책꽂이에 있다). 그러나 여러 문제(입시 스트레스, 체력 저하 등)로 인해 시에 대한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 시 공부를 하며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서정주의 자화상이나 김수영의 풀 같은 시를 읽으며 전율하기도 했다. 한편 시어 하나하나 밑줄을 긋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석하라는 교사들의 말에는 반감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약하게 존재하던 시를 향한 관심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대학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구렸고, 재미없었다(이걸 다 설명하면 글이 삼천포로 흐르니). 물론 그게 꼭 대학 문제는 아니다. 내 문제도 있었을 거다. 어쨌든 나는 대학에 스며들 수 없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대학은 낯선 장소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학에 대한 내 관심은 사라졌다. 먹고사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부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몇 달 전 누군가가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추천 해 줬다. 그러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동대문도서관 신간 코너에 고이 꽂힌 그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작년 말에 출간된 책이 아직도 구김하나 없는 상태로 모셔져 있었다. 사람들이 시를 안 읽긴 정말 안 읽나보다, 생각했다. 그 시집은 첫 시작부터 강렬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첫 시 제목이다.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 감춰진 의미를 찾는 것. 그게 문학의 역할(힘?)인 듯 하다. 그 점에서 그 시는 나를 일깨웠다. 어려운 시도 많았지만 읽을수록 마음속으로 무겁게 잠기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결국 책도 잘 안 사는 놈이 시집을 사게 만들었다. 그러다 고종석의 직문직답 강연에 가서, 시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더욱 상승했다. 그가 추천한 황인숙의 시집들을 검색해봤다. 중랑도서관에도 꽤 있었다. 무작정 가서 이 시집<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빌렸다. 


이 책은 이제 오십대 중반에 이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란다. 그의 시는, 비슷한 시기에 빌린 젊은 작가들의 시집에 비해서는 훨씬 쉬이 읽힌다. 그렇지만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다. 누구나 느낄만한 인생의 고민, 생활 속의 발견을 발랄하게(이 표현을 여럿이 쓰던데, 정말 딱 맞는 듯하다)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 발랄함은 10대 소녀의 발랄함은 아니고, 좀 더 성숙한, 무게 있는 발랄함인 것 같다.


수십 편의 시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산오름/장마/그 참 견고한 외계/지붕위에서/낮잠/여름 저녁/골목쟁이/알 수 없어요/아무도 아닌 사람/패배자들의 가능세계

같은 시들이었다.


그 중 가장 따스하면서 재치있는 시는 '지붕 위에서'다.  


'지붕 위에서' - 황인숙


기와지붕, 슬레이트지붕, 콘크리트 지붕, 천막으로 덮인 지붕

굽이굽이 지붕들의 구릉과 평원을 굽어본다

지붕들이 품고있을 크레바스와 동굴들, 겹과 틈까지

샅샅이 굽어본다

와우, 저 지붕을 쫘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 견적을 뽑는데

은빛 천막 위에서 몸을 쭉 뻗고

일광욕을 즐기던 고양이가 예감이 이상한 듯

고개를 들어 둘러보다 나를 향해 얼굴을 멈춘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걱정마시라, 네 영역을 공유하기에

내 몸은 너무 무거우니까

저 공중 공간의 활용자인 고양이들

고양이의 몸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고양이를 위로 위로 올려보내서

광할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

아드레날린 중독자인 고양이들이여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

말하자며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사이이의 허공에

너희는 환장을 하지

그래서 마치 지붕들이 고양이를 낳는 듯

불쑥불쑥 고양이가 지붕위로 솟는 것이다

지붕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화자는 각양각색의 지붕들이 보이는 높은 곳에 사는 듯하다. '지붕을 쫘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란 표현 참 발랄하다. 그렇게 잡상을 떠올리며 무심하게 흘릴 풍경에서 그는 고양이를 발견한다. 고양이를 향한 화자의 따스한 마음이 펼쳐진다. 너를 해할, 괴롭힐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 그리고 이어지는 고양이 찬가. 글을 따라가다 보면 위태로운 지붕위 공간이 전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화자는 고양이의 공간을 방해하는 대신 감탄으로 그친다. 마지막 행이 재미있다. '지붕위의 뒤안길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뒤안길과 위안길이란 언어유희가 더해져 시는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읽는 내 마음 온도도 같이 상승한다.


시가 더 읽고 싶어지는 여름이다. 시를 무용한 '말의 타래'로 여겼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웃기다. 힘과 위로가 될 것들은 항상 근처에 있었는데, 찾지 못했던 지난한 날들이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읽을거리 걱정은 없을 듯하다. 기분이 좋다. 내게 한강의 시집을 추천했던 그는, 아마 별 생각없이 지나가는 말로 그랬겠지. 그런 하찮은 말이 큰 기회를 열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그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내게 이런 우연의 기쁨을 열어준 것은 굉장히 고맙다. 그에게도 행복한 우연이 가득하기를(그를 다시 볼 일이 없을테니, 무리한 부탁으로 귀찮게 했던 점도 같이 사죄하는 의미에서).

책을 빌릴 때까지 저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고종석의 문장>에 저자의 다른 책 <9월이여 오라>가 추천도서로 올라와 있길래, 더 정확히는 좋은 선동문의 예시로 나와 있길래 무작정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당연히 <9월이여 오라>를 빌리려 했지만 동대문도서관에는 그 책이 없었다. 꿩대신 닭으로 빌린 책이다. 내게 주어진 최소한의 정보는 그가 여성이라는 점 뿐이었다.


책을 펼치고, 몇 페이지 읽어보고서야 이 책이 댐 개발반대론과 반핵론을 담았다는 걸 알았다. 평소에 관심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문장에 주목하려고 선택했다. 짧은 문장과 단호한 말투로 채워진 페이지들, 읽기에 매우 수월하다. 집에 가는 만원 버스에서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책을 옴켜쥐고 읽었다. 페이지 넘기기가 매우 불편했지만, 입바람을 한 껏 활용했다.


책은 두 개의 글로 이뤄졌다. 하나는 '공공의 더 큰 이익', 다른 하나는 ' 상상력의 종말'이다. 전자는 사르바르 사로바르 댐 건설을 둘러싼 정부, 로비스트, 세계은행의 검은 동맹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는 지역주민들의 투쟁을 따라간다. 후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 경쟁을 비판한 글이다.


'공공의 더 큰 이익'. 이 글의 미덕이라면, 글쓴이의 일관된 올곧음일 것이다. 글쓴이는 주민의 입장에 서서 사브바르 사로바르 댐 건설 문제점을 통쾌하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주장만으로 끝나지 않고, 적절한 통계나 근거자료도 같이 보여주고 있다. 글쓴이는 댐 건설로 인한 이주자가 지난 50년간 4000천 만명에 달한다는 추산을 인용한다. 이는 물론 확신할 수 없는 수치이지만, 그만큼 셀 수 없는 사람이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또한 댐 건설의 핵심 기치인 '원활한 물공급'이 허구이며, 그만한 급수 시스템을 구축할 능력이 인도 정부에 없다는 것도 밝힌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땅을 산 사업자들이며, 대다수의 소시민들은 물공급에서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이런 일련의 개발 부작용이, 인도사회의 오랜 계급 문제와 얽혀 더 큰 혼란이 벌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간 댐 개발은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왜 가끔 수몰지역 주민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처럼. 그래도 그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한국은 인도보단 덜 막장이구나 생각하게 되지만. 그걸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다.


밀양 송전탑 사건을 바라보며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처음엔 소외된 약자로서의 그들의 처지에 크게 공감했다. 이내 국가차원의 비용문제도 쉬이 여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송전탑 선로 변경 비용을 국민이 나눠진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평화롭게 일이 해결되는 것이었겠지만. 현실은 씁쓸하게 끝나고 말았다.


인도의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가져다 붙이기는 힘들지만, 개발로 잃는 것들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홀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대개 그 대상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랑 상대(이성이건 동성이건)인 경우가 많다.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예술작품일수도 있다. 혹은 칸막이 속 활자의 연속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말할 경험이다. 당시는 2004, 어쩌다 보니 딱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대입 논술시험을 대비한답시고 신문을 스크랩하던 고등학생은 사진 속 한국일보 칼럼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건 아름다움이었다. 글은 강하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따스함을 내뿜고 있었다. 고종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됐다. 그전에도 그의 글을 조금씩 읽었지만 이 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중학생 때까지 주로 대중 소설을 좋아했던 내게 사회적 시의성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글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뒤로 10년 동안 내 관심사는 꾸준히 변했지만, 고종석 글에 대한 관심은 멈추지 않았다. 인생의 순간순간 기자의 삶을 상상해보게 만든 것도 이 사람이다. 물론 스스로 기자의 깜냥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지만. 여전히 글로 세상을 조금 변화시킬 수 있을까하는, 헛된 꿈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 때마다 본디 회의적인 나는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쉽게 결론 내리곤 한다. 하여 글 잘 쓰는 사람이라도 되는 게 더 현실적인 목표다. 작년 늦가을 쯤 했던 고종석의 글쓰기 강좌를 꼭 들으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러 사정으로 듣지 못했지만, 강좌가 곧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안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지나 올 6월에야 출간됐다.

 

글을 잘 쓰려는 욕망이 있기에 이런저런 글쓰기 책을 많이 찾아봤다. 특히 최근엔 글쓰기 책이 많이 출간됐다. 자연스레 무엇을 봐야할지 헷갈린다. 서점과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찾아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은 많지 않았다. 지금껏 가장 좋았던 건 조셉 윌리엄스와 그레고리 콜럼이 지은 <논증의 탄생>이었다. 논증의 기초부터 실제 적용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단 논쟁적 글쓰기(Argumentative Essay)에 한정돼, 보다 자유로운 작문은 다루지 않는 게 아쉬웠다. 이 책 말고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도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많은 인용을 통해 다양한 좋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고 있다. 미국인 작가라 영미권의 글만 소개한 건 아쉽지만. 그 밖에 책들은 괜찮은 것이 드물었다. 내용이 대부분 비슷하고 글쓰기의 실제적 내용은 소홀하게 다루는 것들이 많았다.

 

그 점에서 이 책 <고종석의 문장>은 독특함을 지닌다. 먼저 저자가 그간 여러 장르의 글쓰기로 평단과 독자의 인정을 받아온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저자의 이름이 책의 우수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같이 그의 글을 오래 읽고 신뢰해 온 사람에게는 선택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으레 좋은 글에 대해 할 말이 많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니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보면 이 책과 그 바탕이 된 강의는 여러 특징을 갖는다. 우선 다른 글쓰기 강의와는 달리 교양을 매우 강조하는 점이다. 그건 글의 재료가 될 사회 여러 분야의 교양 뿐 아니라 실제 문장을 짓는 데 도움이 될 언어학 교양도 포함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뻗어나갈 가지가 많다. 그가 언급한 책들을 읽어볼 수도 있고, 그가 예시로 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조사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글을 쓰기 위한 지식이 서서히 쌓여 갈 것이다. 또 글의 색깔을 풍성하게 할 조언을 얻을 수도 있다.

 

저자가 자신의 저서 <자유의 무늬>를 직접 교재삼아, 글다듬기의 여러 팁을 보여주는 것이 다른 차별점이다. 대체로 자신의 옛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많다. 출간한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티가 많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비판을 통해 좋은 문장, 좋은 글의 조건을 제시한 점은 이 책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 이로써 독자는 문장을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나도 막연히 그의 문장에 흠잡을 게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작가의 이름값에 대한 막연한 맹신을 버리고, 의심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점이 이 책 서술 방식(그 바탕이 된 강의 진행 방식)의 미덕이다. 대체로 저자는 더 자연스럽고 쉬이 읽히는 쪽으로 문장을 고친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돼 있고, 각 장의 큰 주제는 글을 왜 쓰는가’,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인터넷 글쓰기’, ‘아름다운 한국어 어휘등이다. 또 각 장은 글쓰기에 대한 여러 교양 지식을 알려주는 부분, 글쓰기 이론 부분, 이를 바탕으로 <자유의 무늬>를 분석하는 글쓰기 실전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내용들은 상당수 저자의 옛 저서들에 다뤘던 내용이다. 그래서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책이 강의를 바탕으로 한 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다만 책 내용이 주로 단어와 문장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쉬웠다. 앞의 글쓰기 목적이나 교양 언어 지식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저자의 탐구범위가 문장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는다(제목이 고종석의 문장인 이유가 그 때문일까). 아무래도 이 책이 두 권으로 예정된 시리즈의 앞 권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보다 큰 차원에서 문단내의 문장의 배치나 글의 흐름을 짜는 전략 등에 매우 관심이 많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중요한 것처럼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도 중요할 테다. 또 본문의 배치나 서술 방식에 따라서 글의 결도 완전히 변한다. 2권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기를 기대한다.

 

사소한 지적

 

글쓰기 실전, 88페이지의 예시와 149페이지의 예시가 겹친다.

160페이지의 두 번째 줄, ‘1900년대 말은 문맥상 ‘1800년대 말이 맞아 보인다. 편집자가 그 윗줄 ‘19세기 말이라는 표현과 헷갈린 듯싶다.

 

사실 이 책은 힐링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압도적 부분이 재능보다 훈련에 달렸다.” 이 문장 말이다. 요새 글쓰기로 골머리를 앓는 내게 이보다 더 반가운 문장은 없다. 학창 시절 내내 글쓰기를 두려워했다는 그의 고백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믿어도 될 듯하다. 이제 다시 연습할 일만 남았다.

가끔 도서관 신착도서 코너에서 책을 빌린다. 생각지 못한 좋은 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도서관에 들렀을 때도 신착도서 코너를 유심히 보곤 한다. 에릭 호퍼의 <영혼의 연금술>은 그렇게 빌린 책이다. 에릭 호퍼라는 인상적인 이름 때문에, 그리고 연주황의 깔끔한 책 디자인 때문에 서가에서 꺼내 보게 됐다. 짧은 것은 두 세문장에서 긴 것은 한 페이지 분량으로 된 잠언 모음집이었다. 


처음엔 그저그런 자기계발서인가 했다. 그러나 짧은 문구들을 몇 개 읽어나가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가장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도, 가장 둔감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큼도 자신을 관찰하지 못한다." 같은 매혹적인 문장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에릭 호퍼란 이름을 두고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교양수업에서 알게 된 에드워드 호퍼, 빛의 인상적 사용이 돋보이는 화가라는 설명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에드워드 호퍼 전기도 빌렸지만, 천 쪽을 훨씬 넘기는 분량에 압도당해 3주 동안 책 속 그림만 구경하고 반납했던 흑역사도. 아무튼 몇 초의 시간동안 둘을 헷갈리지 않았다면 이 책을 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식함, 어설픔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하다.


짧은 문장은 대개 위험성을 갖는다. 마치 오늘의 운세 마냥,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명 코걸이 식으로 제 멋대로 해석하기 쉽다. 근거를 부연할 뒷 문장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이 확신에 차 있다면 더 위험하다. 그저 편견에서 나온 고집스러운 문장으로 끝나기 쉽다. 책을 여러본 다시 본 결과, 이 책의 문구들은 그런 위험성을 대체로 빗겨간다, 고 조심스레 말해본다. 결코 쉽게 써낸 문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검색결과 이 사람은 거리의 철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써냈다 한다. 그런 배경이 좀 더 책을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아마도 내게 깊이 내재된 철학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비교적)쉽고 직관적으로 인간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도 더러 있지만.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진정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존심을 얻을 수 없는 경우. 시기하는 마음이 욕망 대신 들어선다.- p142


-우리가 영향을 주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그 정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p152


-다른 사람을 기꺼이 칭찬하는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 꺼리는 사람은 상대방의 칭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결국 영혼의 그릇이 작을수록 감언이설에 넘어가기 쉽다. p161


-다른 사람의 평가가 그다지 많이 신경쓰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견해에 관대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갈망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중요성이 두렵지 않다. 두려움과 옹졸함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p162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은 충동은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할 때 가장 강해진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좀처럼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p163


- 누구가에게 동의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증오할 기회가 많음을 의미한다.- p316






<이제는 누군가 해야할 이야기> 김영란, 김두식


이야기를 엿듣는 건 재밌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 좋았다. 버스에서 억지로 들어야만 하는 시시콜콜한 사생활 이야기가 아니라면 대화를 듣는 건 영감의 원천이 될 때가 많다. <공부논쟁>에 이어 다시 대담집이다. 대화체라 술술 읽히는 점이 마음을 끈다. 게다가 믿고 보는 김두식의 책이라 내용에 어느정도 신뢰도 있었다. 책의 두 저자는 전직 대법관이자, 책의 집필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었던 김영란과 경북대 교수 김두식이다. 둘의 지식과 전문성은 이미 검증됐기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책이 출간된 2013년 5월부터 읽겠다고 다짐했으니, 읽기 시작하는데 1년이 걸린 셈이다.


재밌는 건 둘이 대담을 나누게 된 배경이다. 김두식이 한겨레신문 토요일판에 인터뷰 코너를 맡던 때, 김영란 위원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고 돌아온 건, 김두식의 책을 잘 읽었다는 소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김두식은 2012년 10월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김영란 위원장이 같이 책을 쓰고 싶다는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김두식의 매력이 김영란에게도 어필한 것이다. 그렇게 책이 시작됐다.


책의 부제는 '공정한 사회를 위한 김영란, 김두식의 제안'이다. 그렇듯 두 저자는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원인은 '엘리트 카르텔'이다. 이는 김두식이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말한 '신성가족'과도 일맥상통한다. 그 책에선 주로 법조계의 어두운 면을 다뤘다면, 이 책은 그것을 포괄한 공직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한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이른바 '김영란법'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이 두 대안이 공직사회 비리를 해결에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의견을 모은다. 청탁과 관련해 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지금 법 체계에선 대가성 있는 뇌물만 처벌가능하고, 대가성 없는 돈은 그렇지 않다. 특정 청탁과 무관하게 계속 돈이나 편의를 제공받다가 어느 순간 청탁이 들어가면, 공무원 입장에선 그동안 받은 게 있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김영란은 구체적 처벌규정과 공무원 행동강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오랫동안 이슈가 돼 온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이다.


너무 까다롭게 규제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여기에 대해 김영란은 오히려 규제가 확실해야 성실하고 착한 공무원들이 부정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확실한 규제가 부정의 가능성을 막으리라 보는 것이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와 관련해선 권력 감시와 분권을 이야기한다. 검찰에선 기능중복, 검찰의 사기 저하 등을 이유로 반발하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이토록 신뢰를 잃은 것도 극소수의 정치사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립된 공수처에 나눠지면 검찰이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조직을 위한 무리한 수사, 기소 남발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또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를 놓고 관련 기관들이 서로 경쟁하게 돼, 수사의 질을 높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가외성의 확보다. 또한 비대대한 경찰조직과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는 검찰조직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이 확실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않는다. 큰 틀에서 필요성을 말하고 구체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책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쉽게 말하고, 어려운 건 빠져나가는게 아니냐 비판할 수 있지만. 그만큼 구체적인 사안은 공론장에서 꾸준히 논의돼야 한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책에선 정치자금 관련 논의도 이뤄진다. 정치는 돈 먹는 하마라는 것, 이 현실을 바탕으로 정치인들이 정치자금을 공개적이고 원할하게 모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 등.


300여 쪽 분량에 비해 전문적인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담의 형식을 빌려 입말을 주고받는 점, 전문 법지식이 없는 시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쉽게 설명한 점 때문이다. 그래도 논의의 핵심을 꿰뚫는 대화가 오가기 때문에 보고 나서 공부할 거리는 많다. 그런 점도 <공부논쟁>과 비슷하다. 가끔 나오는 김영란 위원장의 개인적 경험도 재미 있다. 마침 김영란 법이 다시 이슈로 떠오른 시점, 잘 읽은 책이었다.

재미 있는 형제다. 그리고 용감한 형제다. <공부논쟁>은 김대식, 김두식 형제가 같이 만든 책이다. 제목처럼 책은 공부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을 담았다. 김두식은 이 책이 '공부, 엘리트, 탁월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밝힌다. 논의는 한국 대학 교육에 맞춰져 있다. 논의의 출발은 명확하다. '왜 한국의 대학 연구자들은 이 모양 이꼴인가?' 형제는 이 물음에서 나오는 세부 주제에 대해 각자의 관점을 분명히 밝힌다. 왜 이렇게 똑똑한 한국 학생들이 대학교에 오고 나면 멍청해지는가. 이것들은 주로 김대식의 입을 통해 나온다.

 

김두식의 지난 책 <욕망해도 괜찮아>를 통해 이미 '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재미있는 캐릭터인 줄 몰랐다. 둘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상당한 의견차이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접점을 찾아내 의견을 모으기도 한다. 직설적이며 통쾌하다. 동생이 겸손하면서도 날카롭다면, 형은 거침없으면서도 차갑지만은 않다. 동생은 형이 '옳다고 믿으면 누구와의 싸움도 피하지 않는다'고 말 한다. 형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말 겁없는 것은 동생'이라고 말한다. 이 조합이 빚어내는 조화가 마음에 든다.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까닭을 형 김대식은 유학파의 문제에서 찾는다. 그는 모든 학자들이 자기 집을 지어야 한다고 본다. 학문적 독립성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학파들은 그렇지 못한다. 자신이 유학한 해외학교 교수에게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존재가치를 스스로의 학문 성과에서 찾는 게 아니다. 해외 지도 교수와의 인맥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김대식은 서울대의 사례를 직접 들며 심각성을 지적한다. 물론 실명을 거론하진 않지만,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뜨끔할 내용이다. 상당히 표현이 과격하다. 이러고도 이 사람 동료들 사이에서 무사할까 할 정도로(그러나 아직 무사한 걸 보면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조용한' 동료들이 많은 건지도).


김대식은 한국 대학이 연구로 성과를 내려면, 국내 박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버드에서 박사따고 온 사람은 그 나라의 인프라를 누린 것일 뿐이란 거다. 그런 사람이 노벨상을 따봐야 한국 기초과학의 발전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서 '서울대 학사를 나와 외국에서 석박사를 딴 사람들'이 자교 박사를 무시하는 행태도 비판한다. 우리 학계의 독자 발전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동종교배(협소함의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자기집을 짓는 긍정적 의미로서)를 통해 우리의 경쟁력을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그의 비판이 연구에만 향해 있지는 않다. 유학파 교수들의 '기러기 아빠' 행태도 역시 도마에 오른다. 외국 지도교수에 매여 있고, 유학시절의 감성에 젖은 교수들이 자식들도 해외로 유학을 보낸다. 그 시절의 묘한 향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연히 방학마다 연구실을 비운다. 연구 질이 하락할 뿐 아니라 우리 대학 교육에 대한 신뢰도 떨어뜨린다. 대학 교육의 핵심인 교수들이, 정작 자신의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공계 이야기가 주가 되다보니 김대식의 역할이 크다. 동생 김두식은 문과의 사례를 보충하거나 형의 주장을 적절히 보완한다. 명쾌한 대화다. 그러나 읽고 나서 한 켠에 씁쓸함도 생긴다. 우선 책에서 말하는 한국 대학의 암담한 현실이 그렇다. 더불어 이 두 학자 형제의 정체성이다. 그들은 각자의 집단에서 다소 아웃사이더에 속하며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런 그들 마저도 한국의 가장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전혀 아니다.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만이 엘리트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그것이 주로 잘 먹히는 풍토)가 문제다.


형은 서울대 물리학과, 버클리대 물리학 박사 등을 거쳐 서른 즈음에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된 사람이다. 동생은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24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다. 어찌 보면 누구나 목 높여 해야 할 비판인데도, 이 정체성은 이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어준다. 예전 강준만이 서울대 해체론을 폈을 때 그 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공격을 받았던 과거가 떠오른다. 콤플렉스 때문 아니냐는 것이었다. 김대식 두식 형제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 아직도 우리 사회가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주장이 더욱 공론화돼 누구나 자유롭게 우리 대학교육과 연구의 개혁에 대해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 시작으로서 이 형제의 노력은 칭찬할 만 하다. 그 밖에도 형제의 성장 과정이나 성격 차이를 다룬 부분도 흥미롭다. 재미 있던 것은 형제의 예민한 방광에 관한 이야기였다. 김두식은 예민한 방광 때문에 화장실에 그냥 자주가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물을 안 먹었다고 한다. 김두식과 달리 김대식은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소변 양을 재서, 성인 평균인 500미리 정도가 될 때까지 참았다는 것이다. 예민깨나 하는 나로서도 한 번 참고할 만한 방법인 듯 하다. 간만에 즐거운, 그러면서도 생각거리를 많이 남기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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