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네 권의 시집은 지난 7월 17일 정독도서관에서 빌렸다. 갑자기 시 바람이 불어 무리해 버렸다. 원래는 한 권씩 감상을 올리려 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도매금으로 쓰게 됐다. 그 말인 즉슨 이 글은 조금 허접스런 글이 될 거란 얘기. 읽은 것들은 반드시, 아니 웬만하면 기록으로 남겨보자고 마음 먹었기에 글의 '낮을 밀도'를 스스로 용서하기로 한다.
1. <화사집>. 너무도 유명한 서정주의 시집이다. 쉽게 읽히는 시도 있었지만, 대체로 해설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화상'같은 대표시는 고등학교 때 지겹게 들어서 문제없이 읽었다. 인상적인 표현이 너무 많지만, 역시 백미는 마지막 두 행이다.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뭘 좀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대단한 표현이다. '문둥이'도 짧고 임팩트 있다. '해와 하늘 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내가 빌린 것은 2001년 문학동네에서 낸 책인데, 서두에서 1941년 남만서고에서 간행된 초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당시의 한글표기법을 따르고 있고, 한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래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튼 한 번 읽어 본 느낌으론 모르겠다. 한국어 시의 최고봉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엔 내 독해가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2.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먼저 읽은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무척 좋았기에 기대한 시집이다. 그의 시집을 발매순으로 읽었다면 좋겠지만, 이미 뒤죽박죽이 돼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도 위로가 되는 시들이 많다. '긴말하기 싫다' 같은 시. '그냥 멍청한 것/그냥 삐뚜름한 것/그렇다면 그냥 견딜 만한데/멍청하고 삐뚜름한 것, 아!/찌르륵 거울에 금이 간다/쩍 갈라져 뒤집어질 것 같다//어쩌겠니, 내가/어제 오늘 못생겨진 것도 아니고……/항상 이렇게 생겼었다는 것이/위로가 되다니!'
시집의 표제작인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사랑스러운 시다. '비가 온다./내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비가 온다구!/…' 이 구절이 특히. 내게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이유도 없이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지금도?). '…/비가 온다구!/나의 소중한 이여./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누군가 내게 이유없이 그렇게 연락해도 기쁠 것 같다(기쁘다). 그밖에도 좋은 시들이 많다.
3. <입 속의 검은 잎>, 너무도 유명한 기형도의 시집이다. 얼마전 서점에서 봤을 땐 거의 80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내가 빌린 건 2004년에 발매된 35쇄본이다. 예전에 <시인 열전>에서 본 이사람의 인생이 매우 흥미로웠기에,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집이기에 빌렸다.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동시에 성찰적인 내용이 많다. 시들의 풍경묘사가 하나같이 인상적이다. '조치원' 같은 시가 특히.
이 시집의 시들이 사랑받는 건, 아마도 (영원히) 젊은 시인의 외로움과 방황의 정서가 보편성을 갖기 때문일 거다. 섣불리 확신내리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공명할 빈 공간을 남기기 때문이 아닐까.
4.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1982년 생, 젊은 시인 오은의 두 번째 시집이다. 넷 중에 가장 언어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시집이다. 정제된 말장난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찬공'에선 그 유희가 비교적 무거운 고민을 이끈다. '찬 공은 둥글다 내가 찬 공은 둥글다 둥글었다 확실히 둥글었다 저만치 날아가서 아직도 둥근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희망'에서는 그 말장난이 따스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됩니까?/생물이 됩니다. 움직입니다./생물은 어디로 움직입니까?/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생물이 생물을 위로하기 위해/위로, 위로, 더 위로…' 인간적인 말장난(내가 꿈꾸는)의 연속이다. 그밖에도 시집에선 다양한 사물과 단어에 대한 탐구가 끝을 모르고 계속된다.
5. 시는 읽을수록 제맛이라는데, 이번에 본 시집들은 나중에 다시 반복해서 봐야겠다. 당분간 바빠지겠지만 꾸준히 시는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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