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복잡할 때 걷는다. 걷는 행위가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냥 리듬에 맞춰 걸으면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막상 걷고 돌아오면 해결된 게 없으니, 남들이 보기엔 시간낭비일 것이다. 그래도 걷는다.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내 나름의 방책이다.
어제 강동도서관에 간 것은 그래서다. 물론 반납일자가 다가온 책을 돌려줘야 했고, 마침 책에 집중하지 못할 일이 생겨서 다른 도서관에서 빌렸던 것들도 다 갖다 주기로 했다. 그래서 동대문도서관을 거쳐, 강동도서관으로 갔다. 사실은 동대문도서관 주변 지역도 잘 모른다. 그러나 강동보단 더 자주 지나친 지역이라 생경한 기분을 느끼기엔 부족했다. 260번 버스를 타고 신설동에서 내려 동대문도서관에 책 몇권을 반납했다. 다시 청량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왕십리로 가 5호선으로 환승했다. 다행히, 상일동행 열차가 바로 왔다. 지난번에 마천행을 타서 삽질을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길동역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골목은 시끌벅적했다. 저번과 달리 시장의 끝 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생선 비린내 대신 각종 채소 가판대, 반찬 가게가 나를 먼저 맞이한다. 같은 월요일에 들렀고, 시간도 두세 시간 밖에 차이가 안 났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도 있구나. 좁은 길에서 물건에 눈 팔린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도서관 건물로 향했다. 유독 호떡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열 명 가까이 옹기종기 모여 호떡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맛이라도 있는 건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걷다보니 다시 그 생선가판대가 보인다. 그 건너편으로 수박과 각종 과일들도.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가, 생선 비린내가 그때만큼 진동하지 않는다. 책 구경이 목적이 아니기에, 도서관 직원에게 책을 건넨 뒤 자료실 안을 한 바퀴 휭 돌고 나왔다. 다시 봐도 아담하다. 4층 휴게실에 꼭 가보자고 다짐했기에 계단을 밟았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 그랬는지 4층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들어와서 보니, 이 휴게실은 두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안쪽은 유리벽으로 막혀있고, 바깥쪽은 외부 공기가 통하는 곳이다.
안 쪽 테이블에 잠깐 앉았다. 환기가 잘 안 돼 오래있기엔 힘들듯 했다. 예전 일기장을 읽었다. 일기장이래 봤자, 군대 전역하기 전부터 쓰기 시작한 몇 편이 담긴 작은 공책이다. 초반에만 꾸준히 썼을 뿐 그 이후론, 몇 달에 한 편 쓰는 꼴이다. 그래도 예전 글을 읽으면 지금 고민에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렇다. 지금 내 인생에 관한 중요한 어떤 글을 써야 한다. 그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환기 안 되는 휴게실은 별 도움이 안 됐다. 바깥 휴게실이 궁금했다. 문을 열자마자, 확연히 다른 공기의 질을 느낀다. 옥상에 작은 원형으로 패턴을 이루며 뚫린 철제 구조물로 벽을 쳐놓았다. 그 나름 시원하긴 하지만 작은 사이사이로 밖을 바라보는 게 영 거슬렸다.
시원한 공기에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군복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그의 온 얼굴이 뻘쭘함을 표현한다. 곧 그의 옆에 깊숙이 숨어 앉은 여자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예비군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짧은 머리에 개구리마크 없는 전투모를 보니,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상근예비역인가 보다. 상병인지 병장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둘은, 공기 잘 통하는 휴게실에서 사이좋게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방해하기가 싫어 다시 나왔다. 아니 방해받기가 싫어서 나왔다. 어딜가든 이놈의 년놈들이 있다. 지난 토요일 서울숲의 악몽이 떠오른다.
현관문을 나서자 오른편으로 꽃밭이 보였다. 붉은 색 꽃을 피운 키가 큰 식물이 인상적이었다. 혹시 요즘엔 꽃사진을 검색하면 이름을 알려주는 어플도 있지 않을까. 왠지 있을 것도 같다. 다시 눈을 밖으로 돌렸는데 간판이 보였다. 3층 정도 높이에 위치한 ‘봄치과’ 간판. 봄치과라 꽤 인상적인 이름이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시장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요리조리 사람을 피하며 호떡집 앞으로 도착했다. 500원 짜리 호떡을 하나 사서 손에 쥐고 다시 걸었다. 보통 호떡보다 꽤나 두껍다. 베이킹파우더를 잔뜩 넣었으려나. 속이 안 익었을까봐 걱정했지만, 잘 부풀어 익어 있었다. 아무튼 맛을 평범했다.
호떡을 먹고 걷는데 ‘이내과’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세 글자로 병원 이름 짓는 게 흐름인가. 시장 골목을 지나 다른 골목에서 곧 길치과를 발견했기에,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다. 걸으면서 내 진짜 목적이 시작됐다. 길동역을 일부러 지나쳐 골목으로 쭉 걸었다. 걷다보니 신명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온다. 그냥 평범한 학교들이다. 별생각 없이 계속 거닐었다.
다시 큰 길이 나오자 그 길을 따라갔다. 그냥 주위를 둘러봤다. 걷는 사람을,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람, 달리는 차, 은행나무를 봤다. 은행나무에 벌써 파란 은행이 맺혀있다. 벌써 올해도 그만큼 기울었구나. 자연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제일 쉽게 알려준다. 얼마 있으면 그 은행이 누렇게 익고, 땅으로 낙하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발들에 채이고 밟혀, 구린내를 힘껏 발산하겠지. 나도 이번에는 은행보다 더 크게 진동하고 발산할 거다. 물론 구린내 아니고 향기를. 사실 은행나무보다 길가에 줄지어 선 버즘나무가 더 싱그러웠다. 항상 그 나무의 이름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찾아봤다. 다시 잊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지하철 역 세 개를 지나쳤다. 지하철 노선도를 언뜻 떠올렸다. 나는 상일동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상관없다. 막 걷는 게 목적이니. 두 정거장 만 지나면 종점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막 걷는 여정이다. 중간에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버렸다.
길을 꺾자마자 보인 건 롯데 캐슬이었다. 지나온 거리와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그 때 내 발도 피로를 호소했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롯데캐슬앞에서 전복을 파는 이동 차량이 보였다. “전복이 한 마리에 500원, 크기는 잘지만 맛은 끝내줍니다. 롯데 캐슬 주민 분들은 00동 앞으로 나와서 구입해 가시기 바랍니다.” 명일역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그 전복 파는 차를 지켜봤다. 사람들이 속속 모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아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날카로운 경계선이 드러난다. 난 잘 모르겠다.
그렇게 집에 왔다. 정리된 생각은 없었고, 그냥 돌아다니면서 잡다한 생각만 더한 걸음이었다. 그래도 발의 피로에 반비례에 내 걷기욕구가 충족됐다. 그냥 본능적으로 걸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