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게 일이다보니, 저자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그러면서 글과 사람의 차이에 대해 자주 놀란다. 아니 처음에 자주 놀랐다. 이젠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써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실망하게 된다.”

 

고종석의 장편 소설 <해피 패밀리>에 나오는 지문이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특히 독자를 상정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 더욱 들어맞는 내용이다. 자기 노출은 곧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런 구석진 블로그에서, 얼굴모를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기검열을 하고 있으니. 작가가 아무리 균형을 갖고 자신을 표현하려 한들 그것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기 보호본능과 이런저런 편견은 글과 작가의 사이를 계속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직접 내뱉은 작가는 과연 얼마나 반할만한 혹은 실망한 만한 사람일까.

 

7117시 반,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고종석의 직문직답이 열렸다. 글쓰기 책 <고종석의 직문직답> 출판 기념한 질답 시간이었다. 직접 만난(목격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고종석은 솔직하고 격식 없는 사람이었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목소리는 생각 밖. 깔리는 중저음을 예상했건만). 예상외로 상당히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한 이야기를 직접 꺼내며, 자신은 사람이 더 아름다우니 여러분은 복 받은 거라며 농쳤다. 딱딱한 직문직답의 분위기를 해소시켜 주었다. 이 밖에도 중간 중간 사소한 유머로 분위기를 전환하곤 했다.

 

직문직답은 독자들의 질문과 고종석의 답변으로 이뤄졌다. 대부분의 질문과 답변은 책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한 지식을 얻지는 못했지만, 글로만 만나던 작가를 직접 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상파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오기도 했다. 벌써 일주일이 됐는데 방송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날 그의 글이나 직문직답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실망을 하긴 했지만, 이건 프라이버시 문제니 말하는 게 낫겠다. 그저 그도 무심한 중년남성이라는 걸 확인했다고 할까.

 

자세한 직문직답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거칠게 정리한 것이고, 말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남성 작가들은 여성편력을 픽션이나 수필 형식으로 작품에 푸는데, 고종석 작가는 부인이나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용납이 되나?

 

그런 시도를 한 적 거의 없음. 다만 사랑이 문학, 근본적으로 예술의 질료가 되는 건 아주 보편적인 것. 다양한 사랑의 방식(동성애, 근친상간 등)이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인정해야 함.

 

-비판은 중립적이어야 하나?

 

비판과 중립은 모순. 사실 왜곡날조가 아니라면 한 쪽 편을 드는 건 당연. 비판은 정파적, 당파적일 수밖에. 난 소수자의 편에 서서 글을 써 옴. 소수는 양 개념이 아닌 질적 개념(남성과 여성, 자본가와 노동자의 예를 들며). 대표적으로 장애인, 동성애자, 전라도 사람, 선천적 조건으로 소수가 되는 사람들. 편들지 않는 것은 묘사에 불과. 글 쓰는 사람이 소수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건 문제. 작가기자는 소수자 편이어야.

 

동성애 축제에 대한 비판 존재(굶어죽는 사람 등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개인. 어떤 개인에게는 자기의 국적, 성별, 빈부라는 정체성보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강할 수 있음. 그것을 존중해야 함. 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자로서 소수자를 옹호할 수밖에.

세월호 사건. 관련자는 아주 소수지만, 그들은 사건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한 것. 한 사람의 삶은 우주와 같다. 집단이 아닌 개별자로 보는 게 중요.

 

-아름다운 글은 어떻게 쓰나

 

굉장히 어려운 질문. 아름다움을 정의하긴 어려우나 누구나 느낄 수 있음. 글은 논리와 수사로 구성. 좋은 글을 쓰는 데는 논리가 더 중요. 논리는 명료함에 기여, 수사는 아름다음에 기여. 수사는 곧 비유이고, 비유는 크게 은유와 환유로 나뉨. 은유는 사물의 유사성을, 환유는 인접성에서 비유를 끌어옴. 은유-조지훈의 승무(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환유-청와대는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청와대는 건물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또는 측근을 비유.

 

+본인의 가장 아름다운 글은?

 

<사랑의 말들, 말들의 사랑> 수사가 가장 적절하게 들어갔다고 생각.

나는 미적 자본 거의 없음. 보상심리에서 글이라도 아름답게 써야겠다고 생각.

 

-진심이 담긴 글, 나에 대해 아는 게 중요한데. 일기를 쓰는 편. 작가는 자신을 알기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일기는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수단.

대개 좋은, 아름다운 글을 쓴 저자를 만나보면 실망하기 마련. 글쓰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 누구나 자기애가 있고 글에 드러나기 마련. 글쓰기는 자기미화를 필연적 포함. 글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출판사에선 단정적 표현 요구. 자신은 모호한 문장 선호. 차이점?

 

비평적 글에서 필자의 확신을 드러내는 건 선택의 문제. 글 쓰는 사람은 회의주의자가 돼야. 자신도 ‘~듯하다, 싶다표현을 자주 쓰는 편. 독자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는 게 바람직. 정치적 글일수록 지지자를 끌어내기 위해 확신이 강함. 좋은 비평을 하고 싶다면 확신은 금물. 나라면 출판사와 싸우겠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원칙이 충돌할 때?

 

, 등의 표현은 일본식 표현. 없어도 자연스러우면 빼는 게 한국어답다. 단 표준 한국어 문장에만 얽매이면 글이 밋밋해짐. 문장의 다채로움, 문체를 위해서는 자잘한 표현보다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스타일을 만들려는 욕망을 가져야.

 

-필사가 도움이 되나?

나라면 하지 않을 것. 좋은 글, 아름다운 글을 되풀이해서 읽는 게 낫다. 비판적으로 읽으며, 표현을 따져보거나 바꿔보는 방법으로

 

-문학의 유용성?

장 폴 사르트르의 신소설 비판. 세부묘사 집착, 비정치성. ‘구토비판을 통해 신소설 간접적 비판. 장 리카르두의 반박 문학은 굶어죽는 아이를 살리진 못하지만, 굶어죽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추문(스캔들)로 만든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진 못 하지만, 인간성을 지켜주는 역할.

 

-군더더기 없이 글 쓰는 방법?

한 번에 많은 이야기를 담지 말 것. 예를 들어 문단의 경우, 한 문장을 빼도 뜻이 통하면(정보량이 같다면) 빼 버릴 것. 문장의 경우도 품사를 빼고 말이 통하면 (되도록) 뺄 것.

 

-소재 발굴?

시사적인 글의 경우. 인터넷을 뒤져 보는 것. 외국어 사이트도. 중요한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이 안 썼다면 글을 씀.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쓴 글은 없음.

기자 시절 취재나 경험을 다시 돌아보기도 함.

친구만나서 수다 떨거나, 술을 마시다 떠오르기도 함.

 

-고심해서 쓴 문장, 단어에 미련 남을 때 어떻게?

내 경우 빼서 더 좋아지는 경우가 많음. 분량 제한 있는 글 연습이 글쓰기 향상에 도움. 예를 들어 1600자 기준 등. 제한이 있으면 빼야 할 문장, 단어에 대해 고심하게 됨.

 

-평범한 직장인 소설 쓰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음. 소재만 생각하고 발전이 잘 안되는데, 글을 잘 풀어내는 방법은? + 문체는 간결체? 만연체?

 

컴퓨터 앞에서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간결해서 아름다운 문장, 길고 늘어져도 아름다운 문장 존재. 정답은 없음.

 

-본인의 성격이 글쓰기에 영향? 작가의 글쓰기의 동력은?

글쓰기는 노력. 에디슨의 말은 천재의 거짓말. 모든 뛰어남은 어느 정도 타고남. 특히 음악과 수학. 글은 예외. 나도 학창시절 글을 못 썼음. 우연히 첫 직장이 신문사가 되면서 글쓰기 시작. 다만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된 듯. 좋은 글을 많이 되풀이해서 읽어야 함. 물론 좋은 글의 기준도 많이 읽어야 형성.

 

누구의 글이든 비판적으로 읽을 것. 권위에 가리면 안 됨. 사르트르는 사물의 언어, 도구의 언어를 구분. 시는 사물의 언어라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 그러나 프랑스의 혁명시나 한국 독재 시절의 시처럼 반례가 많음. 사르트르의 말은 당시엔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비판받아 마땅. 아무리 권위를 지닌 작가라도 의심하고 비판해야 함.

글쓰기 원동력은 월급!

 

-트윗을 하기에 능력이 아깝지 않나?

절필하고 소통수단으로 여김

 

-보편적 글쓰기 교육이 가능한가?

가능하고 필요하다. 글쓰기는 타고나는 게 아니기에. 현대는 누구나 글 쓸 수 있는, 글쓰기의 민주화 시대. 모든 사람이 저자이자 독자. 그래서 쓰기 교육, 그리고 읽기 교육 중요

 

-언어학 공부가 글쓰기에 영향을 주는지?

공부 전후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

 

-칼럼, 에세이, 소설을 쓸 때 마음가짐 차이가 있나? 시를 좋아하나?

주문생산! 글 쓸 때 장르를 따지지 않음. 태도의 차이도 없음.

한국어다운 글을 쓰고 싶다면, 모국어의 밑동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시를 읽을 것. 산문을 쓰고 싶더라도 마찬가지. 시에는 시인의 단어 선택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음. 어느 언어의 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시는 결국 (시 본래의 형태인)가사의 형태로 살아남을 것으로 전망. 다른 나라의 추세 등을 볼 때.

 

-추천할 시인, 시집은?

가장 아름다운 시집은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이라고 생각. 화사집의 시를 읽고 전혀 감흥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

더불어 절친 황인숙의 시집들 추천.

 

-작가가 되고 싶은데, 문예창작과에 가야 하나?

작가가 되는 기본은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 문예창작과는 확실히 도움된다고 생각. 자신도 더 일찍 창작에 뜻을 뒀다면 문창과에 갔을 것.

지난 발걸음.


6/19 


1. 망우산에 올랐다. 버찌가 사방에 널려 있다. 이 놈들이 전혀 반갑지 않다. 특히나 주차장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포장도로에, 길 양쪽 벚나무에서 떨어진 버찌들이 온통 검은 물을 들여 놓았다. 보기에만 안 좋은 거라면 별 신경 안 썼을 테다. 제일 짜증나는 건 이 버찌들이 신발 밑창에 낀다는 점이다. 한 개만 끼어도 '삐긱삐긱' 소리가 나는데, 보통은 여러개가 밑창의 틈새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진하게 익어 찐득해진 과즙 때문에 한 번 붙으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소리만이 아니다. 걷는 데 이물감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신발을 돌 모서리에 비비며 잔뜩 낀 벚들을 떨쳐내려 하지만 소용없다. 본드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뾰족한 나뭇가지로 일일히 빼내야 한다. 몇 개 빼내면 뭐하랴. 그렇게 몇십 미터 올라가면 다시 가득 떨어진 버찌가 눈 앞에 보인다. 그냥 포기하고 걸을 수 밖에.


벚들을 보며 사람들을 생각한다. 널리고 널린 사람들. 이 좁은 중랑구에도 50만 명이 넘게 산다. 너무 많아서 소중하지 않은 것인지. 그저 소중하지 않은데 많기까지 한 건지. 모르겠다. 대부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칠 뿐이다. 그런데도 신발에 낀 벚들 마냥 마음속에 사람들이 걸린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종종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니 꽤 자주. 내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그립다. 고종석의 소설 속 말 처럼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그리워하다보니 싫어진 걸까. 싫음에도 그리운 걸까.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벗은 찾기 힘들까. 벗들은 없고 벚들만 나뒹군다.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항상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내가 마음을 열고 한발짝 다가가면,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고. 사람들이 한 발짝 다가오면 내가 뒤로 물러선다. 문제는 그게 여러번 반복되면, 인간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다는 거다. 귀찮음과 두려움의 상승작용이 벌어지는 것 같다. 내 문제도 분명히 있긴 하다. 내려오는데 좁은 오솔길을 막고 아주머니들이 벚 줍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다른 사람이 앞에 왔는데도 못 알아채고, 길을 가로막고 앉아 있었다. 이미 봉지에 한 가득한 벚들. 내게도 새롭고 소중한 벗들이 찾아 왔으면. 아니 내가 찾아야 하는 거지만.


2. 산딸기를 다시 먹어 봤다. 여전히 단 맛은 없지만, 신 맛은 확연히 강해졌다. 역시 난 익지도 않은 산딸기를 먹었던 것이었다. 충분히 신 산딸기. 산딸기는 그걸로 족하다.


3. 내려오는 길에 음악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산중에 스피커 따위는 없으니. 조금 더 걷고서야 궁금증을 풀었다. 멀리 보이는 벤치에 흰 머리의 노인이 앉아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코디언인지 반도네온인지 확실하지도 않다. 나중에 알아봤지만 두 악기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과연 내가 들은 건 뭐였을까.


노인은 귀에 익은, 이름은 알 수 없는 노래들을 연주했다. 발걸음을 천천히 하며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다 이내 최고조에 달하고 다시 희미해져 가는 걸 들었다. 그리고 노인이 앉은 벤치에서 100미터 쯤 떨어진 다른 벤치에 앉아 들릴락말락한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 봤다. 등산객들의 발소리와 바람소리 사이로 흐릿한 멜로디가 간간히 전해졌다. 그 노인은 과연 누굴까. 왜 거기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냥 나도 바람부는 산 속에서 하모니카나 불고 싶다. 그럴 실력이 없는 게 문제지만. 


4. 이번 글은 망글이다. 처음부터 시제가 계속 오락가락 했다.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 의문형 종결어미도 너무 많이 썼다. 확신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다. 인간과 관계, 언제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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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도서관 신착도서 코너에서 책을 빌린다. 생각지 못한 좋은 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도서관에 들렀을 때도 신착도서 코너를 유심히 보곤 한다. 에릭 호퍼의 <영혼의 연금술>은 그렇게 빌린 책이다. 에릭 호퍼라는 인상적인 이름 때문에, 그리고 연주황의 깔끔한 책 디자인 때문에 서가에서 꺼내 보게 됐다. 짧은 것은 두 세문장에서 긴 것은 한 페이지 분량으로 된 잠언 모음집이었다. 


처음엔 그저그런 자기계발서인가 했다. 그러나 짧은 문구들을 몇 개 읽어나가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가장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도, 가장 둔감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큼도 자신을 관찰하지 못한다." 같은 매혹적인 문장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에릭 호퍼란 이름을 두고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교양수업에서 알게 된 에드워드 호퍼, 빛의 인상적 사용이 돋보이는 화가라는 설명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에드워드 호퍼 전기도 빌렸지만, 천 쪽을 훨씬 넘기는 분량에 압도당해 3주 동안 책 속 그림만 구경하고 반납했던 흑역사도. 아무튼 몇 초의 시간동안 둘을 헷갈리지 않았다면 이 책을 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식함, 어설픔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하다.


짧은 문장은 대개 위험성을 갖는다. 마치 오늘의 운세 마냥,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명 코걸이 식으로 제 멋대로 해석하기 쉽다. 근거를 부연할 뒷 문장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이 확신에 차 있다면 더 위험하다. 그저 편견에서 나온 고집스러운 문장으로 끝나기 쉽다. 책을 여러본 다시 본 결과, 이 책의 문구들은 그런 위험성을 대체로 빗겨간다, 고 조심스레 말해본다. 결코 쉽게 써낸 문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검색결과 이 사람은 거리의 철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써냈다 한다. 그런 배경이 좀 더 책을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아마도 내게 깊이 내재된 철학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비교적)쉽고 직관적으로 인간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도 더러 있지만.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진정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존심을 얻을 수 없는 경우. 시기하는 마음이 욕망 대신 들어선다.- p142


-우리가 영향을 주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그 정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p152


-다른 사람을 기꺼이 칭찬하는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 꺼리는 사람은 상대방의 칭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결국 영혼의 그릇이 작을수록 감언이설에 넘어가기 쉽다. p161


-다른 사람의 평가가 그다지 많이 신경쓰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견해에 관대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갈망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중요성이 두렵지 않다. 두려움과 옹졸함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p162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은 충동은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할 때 가장 강해진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좀처럼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p163


- 누구가에게 동의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증오할 기회가 많음을 의미한다.- p316






<이제는 누군가 해야할 이야기> 김영란, 김두식


이야기를 엿듣는 건 재밌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 좋았다. 버스에서 억지로 들어야만 하는 시시콜콜한 사생활 이야기가 아니라면 대화를 듣는 건 영감의 원천이 될 때가 많다. <공부논쟁>에 이어 다시 대담집이다. 대화체라 술술 읽히는 점이 마음을 끈다. 게다가 믿고 보는 김두식의 책이라 내용에 어느정도 신뢰도 있었다. 책의 두 저자는 전직 대법관이자, 책의 집필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었던 김영란과 경북대 교수 김두식이다. 둘의 지식과 전문성은 이미 검증됐기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책이 출간된 2013년 5월부터 읽겠다고 다짐했으니, 읽기 시작하는데 1년이 걸린 셈이다.


재밌는 건 둘이 대담을 나누게 된 배경이다. 김두식이 한겨레신문 토요일판에 인터뷰 코너를 맡던 때, 김영란 위원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고 돌아온 건, 김두식의 책을 잘 읽었다는 소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김두식은 2012년 10월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김영란 위원장이 같이 책을 쓰고 싶다는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김두식의 매력이 김영란에게도 어필한 것이다. 그렇게 책이 시작됐다.


책의 부제는 '공정한 사회를 위한 김영란, 김두식의 제안'이다. 그렇듯 두 저자는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원인은 '엘리트 카르텔'이다. 이는 김두식이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말한 '신성가족'과도 일맥상통한다. 그 책에선 주로 법조계의 어두운 면을 다뤘다면, 이 책은 그것을 포괄한 공직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한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이른바 '김영란법'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이 두 대안이 공직사회 비리를 해결에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의견을 모은다. 청탁과 관련해 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지금 법 체계에선 대가성 있는 뇌물만 처벌가능하고, 대가성 없는 돈은 그렇지 않다. 특정 청탁과 무관하게 계속 돈이나 편의를 제공받다가 어느 순간 청탁이 들어가면, 공무원 입장에선 그동안 받은 게 있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김영란은 구체적 처벌규정과 공무원 행동강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오랫동안 이슈가 돼 온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이다.


너무 까다롭게 규제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여기에 대해 김영란은 오히려 규제가 확실해야 성실하고 착한 공무원들이 부정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확실한 규제가 부정의 가능성을 막으리라 보는 것이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와 관련해선 권력 감시와 분권을 이야기한다. 검찰에선 기능중복, 검찰의 사기 저하 등을 이유로 반발하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이토록 신뢰를 잃은 것도 극소수의 정치사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립된 공수처에 나눠지면 검찰이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조직을 위한 무리한 수사, 기소 남발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또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를 놓고 관련 기관들이 서로 경쟁하게 돼, 수사의 질을 높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가외성의 확보다. 또한 비대대한 경찰조직과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는 검찰조직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이 확실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않는다. 큰 틀에서 필요성을 말하고 구체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책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쉽게 말하고, 어려운 건 빠져나가는게 아니냐 비판할 수 있지만. 그만큼 구체적인 사안은 공론장에서 꾸준히 논의돼야 한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책에선 정치자금 관련 논의도 이뤄진다. 정치는 돈 먹는 하마라는 것, 이 현실을 바탕으로 정치인들이 정치자금을 공개적이고 원할하게 모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 등.


300여 쪽 분량에 비해 전문적인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담의 형식을 빌려 입말을 주고받는 점, 전문 법지식이 없는 시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쉽게 설명한 점 때문이다. 그래도 논의의 핵심을 꿰뚫는 대화가 오가기 때문에 보고 나서 공부할 거리는 많다. 그런 점도 <공부논쟁>과 비슷하다. 가끔 나오는 김영란 위원장의 개인적 경험도 재미 있다. 마침 김영란 법이 다시 이슈로 떠오른 시점, 잘 읽은 책이었다.

어제 파마를 했다. 컬 풀리니까 샴푸 쓰지 말라는 미용사 말에 머리도 물로만 감았다. 대신 여러번. 그리고 오늘 여러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내심 누군가 먼저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렸다. 하나 둘 만나는데 아무 말이 없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아는 척을 안한 건지는 모른다. 별 볼 일 없는 외모에 마이너한 변화가 있다고 큰 차이는 없긴 하지만ㅎㅎ


어쨌거나 잠깐의 실망을 지나,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도 관심 없다는 것. 그게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아무리 x같건, 그나마 조금 낫건 사실 인간들은 다른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비슷한 구절을 김두식의 책에서 읽고 굉장히 위안이 됐는데, 직접 겪으니까 효과가 직빵이다. 안 그래도 내 걱정만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 남 시선까지 대리경험, 내재화하며 고민할 필요는 전혀없으니까. 실제로도 그렇다는 실증적 경험. 이런 게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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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산 롤랜드 커크는 유별나다. 대중음악계, 특히 재즈계엔 개성넘치는 사람이 넘친다. 그 속에서도 그는 색이 너무나 분명한 음악가다. 사운드를 듣는 순간 그라는 걸 알아챌 수 밖에 없다. 블루스 연주에서 특히 그는 진부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블루스의 (내가 좋아하는)구질구질함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새로운 사운드를 절묘하게 만들어낸다. 


이 노래는 오래된 구전 블루스를 재해석한 것이다. 작자인 올드 텅 스내처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을 뒤져 봤지만 못 찾았다. 아무래도 구전되던 노래라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노래를 시작하기에 앞서, 커크는 노래의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커크가 굉장히 수다스러운 인물이었단 사실은 유명하다. 특히 그의 라이브를 듣다 보면 곡 사이 잡담이 몇 분씩 이어지기 일수다. 그의 말들은 장난끼와 유머로 가득하다. 어휘는 거칠지만 사회에 대한 그 나름의 명석한 시선이 드러나서 좋다. 


이 음악은 시작부터 사운드가 좋다. 피아니스트 론 버튼의 반주 스타일,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딱 맞는다. 그리고 커크의 첫 소절 플루트 연주. 갑자기 치솟는 도약. 이어지는 하모니카는 그에 비해 좀 구슬프다. 보컬은 노래 속 화자의 욕망을 그대로 거칠게 표현한다. 그는 절대 뛰어난 보컬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어떻게 보컬이 노래에 녹아드는지 동물적으로 안다는 느낌을 준다. 


Rahsaan Roland Kirk : Flute, Chromatic Harmonica, Vocal

Ron Burton : piano

Vernon Martin: bass 

James Madison: drums




<Intro>

We would like to play a tune by an old gypsy blues singer.

오래된 집시 블루스 가수의 노래를 연주하려 해.

You have to be a gypsy in this country to make money...

이 나라에서 돈 벌려면 집시가 돼야 하지

especially if you're black.

특히 흑인이라면

You got to travel all over the damn land, you dig.

망할 나라를 온통 돌아다녀야 돼. 알지?

I'm not bitter, I'm just bittersweet.

쓴 이야기는 아니지. 쓰면서도 달콤한 이야기야.

 

But you have to be a gypsy to survive in this country. Because when you stay in one place you get tagged and the guys say "Oh, that's a local group," you know. [laughter]

이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집시가 돼야만 해. 왜냐면 한 곳에만 머물면 꼬리표가 붙고, 사람들이 그러거든 "오 지역 그룹이군"

"You mean that group's been there for five years?“

그 그룹이 거기에 5년이나 있었다고?”

If we worked at the Vanguard 5 years straight, cat's say "Oh yeah, we go down there once a year, Christmas, New Years." So we go out every now and then and come back. And you all think we done been somewhere.

우리가 (빌리지)뱅가드에서 5년을 쭉 연주한다면 오 그래, 뱅가드엔 1년에 한 번씩 가. 크리스마스, 신년에라고 말할 수 없거든. 그러니 우리는 여기저기 다 떠돌아다니다가 돌아오는거야. 사람들은 다들 우리가 어딘가에서 연주하다가 왔겠거니 하지.

 

Been in the same old riots

똑같은 데만 있었는데도.

But anyway, this is a tune written by old Tongue Snatcher. He wrote this tune back in 1859. Tongue Snatcher, he was a mean character 'cause anything he wanted, he could snatch it with his tongue....Reach out and grab it "Aaardlugh bleyt!" [laughter]

어쨌든, 이 노래는 올드 텅 스내처가 쓴거야. 1859년에 썼지. 텅 스내처는 아주 천박한 캐릭터였지. 뭐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혀로 움켜 쥐었거든. 죽 뻗어서 잡는 거지 “@@%#^$##”

 

Th' man could touch his nose with his tongue...

이 사람은 혀로 코를 닿을 수 있었어.

He could suck his hair...[laughter]

머리카락도 말야...

But anyway old Tongue Snatcher wrote this tune called "Baby Let Me Shake Your Tree." 아무튼 올 텅 스내처는 Baby Let Me Shake Your Tree란 노래를 썼지.

His ultimate goal was to hang out in the tree.

Now one day old Tongue Snatcher worked in the White House. 하루는 올 텅 스내처가 백악관 앞을 걷고 있었지.

He walked up to this lady with his tongue in his hand [...laughter..."He musta' been blind"...] He say "Baby, let me shake your tree."

그는 손에 혀를 들고 여자에게 다가갔지. “베이비, 네 나무 좀 흔들게 해줘

And she was one of them square I'm-a-Hershey-Bar-eaters, stone Apple pie ladies.

그녀는 허쉬바와 스톤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여자였지.

She said “What you mean?” 그녀는 말했어 뭐라고

 

He said "Well, come with me. Now I know you don't have no tree in this asphalt jungle, so you got to know I'm talking 'bout you baby.“

이리와 봐.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Tongue Snatcher was talkin' 'bout the truth. So I hope you can dig it, please.

텅 스내처는 정말로 사실을 말하고 있었지.

 

Lyrics to "Baby Let Me Shake Your Tree"

 

Oh baby, baby, let me shake your tree.

너의 나무를 흔들게 해 줘

Oh baby, baby, let me climb the tree.

너의 나무에 오르게 해 줘.

I started to grab it,

막 잡기 시작했지.

but i sure wanted to be courteous

and ask if I could have it.

하지만 난 공손히 하고 싶었어. 그래서 물어본 거야.

Oh baby, baby, let me hang out in your tree.

네 나무에 매달리게 해 줘.

I don't give a damn how many cats have climbed up in your tree...

너의 나무에 얼마나 많은 놈들이 올랐는지 관심없어.

in the last few months.

지난 몇 달 동안 말야.

I really don't care how many squirrels done got their nuts outa the tree, baby.

얼마나 많은 다람쥐들이 너의 나무에서 견과를 따먹었는지도.

I got to warn you I ain't no rabbit. I'm going to be there a long, long time

and I just got to have it.

경고하자면, 난 토끼는 아냐. 난 거기에 아주 오래오래 매달려 있을 거거든. 가져야만 하니까.

Ohh baby, let me hang out, let me hang out in your tree.

네 나무에 매달리게 해 줘.

Ohh Ohh baby, let me hang out, let me hang out in your tree.

Oh baby, baby, let me climb let me climb up in that tree


I ain't no rabbit. But I hope you can stand it. Cause I'll be there. and it would be like i have it

I really don't care how many squirrels done got their nuts outa the tree.

I don't give a damn how many cats have climbed up in your tree.


저질 체력을 타고 났지만 요새는 특히 그렇다. 7~8시간 자고 깨도 잔 것 같지 않다. 더 잔다고 피로가 더 풀리는 것도 아니다. 번잡한 운동은 못하겠고, 산에 다니기로 했다. 허벅지에 근육이 좀 붙으면 그래도 피로가 덜 해질까 싶어서. 일주일에 서너번 정도만 가려고 한다. 그 이상 가기엔 시간도 여의치 않고. 일단 해보고 모자라면 더하든가 해야지.

 

산이라 해봐야 동네 근처에 있는 뻔한 산이다. 바로 집 앞은 망우산, 조금 건너가면 용마산, 더 가면 아차산. 이렇게 알고 살아왔는데, 정확히는 아차산 내에 용마봉, 망우봉이 있는 것이었다. 20여년을 다녀 놓고 이제야 알다니; 물론 그래봐야 군대 가기 전 거의 매일 가던 시절 빼고는 기껏해야 한 해에 네다섯번 가면 많이 가는 것이었으니. 이곳엔 거진 일 년 만에 오르는 것 같다. 그제는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정상까지 안 가고 돌아 내려왔다. 두시간 정도 걸렸다. 어제는 좀 더 재촉해 용마산 정상까지 다녀 왔다. 더 빨리 걸어 두시 간 반 정도로 걸렸다.

 

햇볕을 피하려고 반팔 위에 셔츠를 걸치고 갔더니 땀이 한바가지였다. 땀 삐질하며 헉헉대며 걷는데, 주변에 다 중장년들. 내 또래에 평일 오전에 산에 갈 사람이 얼마냐 되겠냐만은. 아무튼 크게 신경은 안 쓴다. 당장 떨어진 체력 회복이 급하다. 당장은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그제는 낮잠을 두시간이나 잤다. 한동안 잠 안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할 듯.

 

이곳저곳에 산딸기가 참 많았다. 빨갛게 맺힌 것이 탐스러워 한 입 먹어보았다. 결과는 후회. 몇 년전 먹었을 때는 새콤하기라도 했는데. 이건 아예 맹맛이다. 덜 익은 건지 뭔지, 몇 개 더 먹었으나 마찬가지.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해야지. 어쨌든 꾸준히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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