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게 오래됐다.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난다.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 계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그것은 곧 몸에 박힌 습관으론 평생가도 쓰지 못할거라는 얘기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씩 써 나가려 한다. 말장난의, 장난말의 항연이다. 아마도 수시로 더해지고 고쳐질 글이다.


-닿다


닿는 것은 두가지로 나뉜다. 가닿는 것과 와 닿는 것이다. 앞에 것엔 의지가 담기고 뒤에 것엔 담기지 않는다. 능동과 수동. 그렇지만 두 단어가 모두 마음에 든다. 닿는 행위는 야한 것이니까. 닿는 것은 통하는 것이고, 통하는 것은 설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닿는 것이든 와 닿는 것이든 좋다. 가장 좋은 것은 가닿는 내 손길과 와 닿는 너의 손길이 맞닿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가닿으려는 내 마음이 거부당할 때다. 항상 찾는다. 내 가닿는 마음과 손길이 향할 사람은 누구일까. 상대도 거기에 화답할까.


-듣다

'듣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사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어중간한 인생에서 음악 듣기보다 즐거운 일은 (아직 별로)없다. 듣는 것은 들이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들을 내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일부는 내 것이 되고 나머지는 다시 튕겨 나간다. 그렇지만 많이 들이려고 노력할수록 많이 얻는다. 그래서 듣는 것은 나를 굳건히 받치는 행위다. 어간 '듣'은 ㄷㅡㄷ으로 분해된다. 열린 것을 다시 받치는 열린 것. 튼튼히 받치면서도 열려있다. 열려있기 때문이 더 튼튼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항상 (아직) 온전한 내 귀에 감사할 따름이다.


-온전하다

온전하다의 형용사형 '온전한'은 오롯이와 영역이 겹친다. 전자가 한자어고 후자가 순우리말이라는 것을 빼면. 오롯이 역시 끌리는 단어지만 왠지 새침데기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뚝이같은 집착도 느껴진다. 제가 이만큼 멀쩡하다는 걸 알리려는 듯 하다. 반면 온전하다는 온도를 전한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절로 온기를 풍기는 사람처럼. 멀리선 오롯이 서 있고 가까이선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은은하다

은은한 것은 튀지 않는다. 밍숭하다. 그래서 오래간다. 어쩌면 은은한 것은 내 생존의 본능이다. 적당히 타올라야 오래갈 수 있는 걸 아는 촛불처럼. 극심한 고저를 오가는 사람은 안정할 수 없다. 막상 은은하려고 하면 쉽지 않다.

 

-홀, 홀로

홀로 서는 것은 멋있다. 아기가 처음 제 두 발로 걷는 것 처럼. 육체와 정신아 홀로 서는 것은 아름답다. 아직 그렇지 못한 내 소망이 담긴 취향이다. 내 생각엔 사람은 먼저 홀로 서야, whole being이 될 수 있다. 말장난이나 정말 그렇다. 물론 그렇게 홀로 서도 어딘가에 작은 홀hole 하나가 뚫려 있을 것이다. 그 자리만은 홀로 채울 수 없을지도. 그 자리를 메울 누군가를 만난다면 좋겠다.

 

-섞이다

'섞인 것은 아름답다'고 누가 말했다. 과연 그런가. 섞는다고 곧 융화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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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형제다. 그리고 용감한 형제다. <공부논쟁>은 김대식, 김두식 형제가 같이 만든 책이다. 제목처럼 책은 공부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을 담았다. 김두식은 이 책이 '공부, 엘리트, 탁월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밝힌다. 논의는 한국 대학 교육에 맞춰져 있다. 논의의 출발은 명확하다. '왜 한국의 대학 연구자들은 이 모양 이꼴인가?' 형제는 이 물음에서 나오는 세부 주제에 대해 각자의 관점을 분명히 밝힌다. 왜 이렇게 똑똑한 한국 학생들이 대학교에 오고 나면 멍청해지는가. 이것들은 주로 김대식의 입을 통해 나온다.

 

김두식의 지난 책 <욕망해도 괜찮아>를 통해 이미 '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재미있는 캐릭터인 줄 몰랐다. 둘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상당한 의견차이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접점을 찾아내 의견을 모으기도 한다. 직설적이며 통쾌하다. 동생이 겸손하면서도 날카롭다면, 형은 거침없으면서도 차갑지만은 않다. 동생은 형이 '옳다고 믿으면 누구와의 싸움도 피하지 않는다'고 말 한다. 형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말 겁없는 것은 동생'이라고 말한다. 이 조합이 빚어내는 조화가 마음에 든다.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까닭을 형 김대식은 유학파의 문제에서 찾는다. 그는 모든 학자들이 자기 집을 지어야 한다고 본다. 학문적 독립성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학파들은 그렇지 못한다. 자신이 유학한 해외학교 교수에게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존재가치를 스스로의 학문 성과에서 찾는 게 아니다. 해외 지도 교수와의 인맥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김대식은 서울대의 사례를 직접 들며 심각성을 지적한다. 물론 실명을 거론하진 않지만,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뜨끔할 내용이다. 상당히 표현이 과격하다. 이러고도 이 사람 동료들 사이에서 무사할까 할 정도로(그러나 아직 무사한 걸 보면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조용한' 동료들이 많은 건지도).


김대식은 한국 대학이 연구로 성과를 내려면, 국내 박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버드에서 박사따고 온 사람은 그 나라의 인프라를 누린 것일 뿐이란 거다. 그런 사람이 노벨상을 따봐야 한국 기초과학의 발전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서 '서울대 학사를 나와 외국에서 석박사를 딴 사람들'이 자교 박사를 무시하는 행태도 비판한다. 우리 학계의 독자 발전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동종교배(협소함의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자기집을 짓는 긍정적 의미로서)를 통해 우리의 경쟁력을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그의 비판이 연구에만 향해 있지는 않다. 유학파 교수들의 '기러기 아빠' 행태도 역시 도마에 오른다. 외국 지도교수에 매여 있고, 유학시절의 감성에 젖은 교수들이 자식들도 해외로 유학을 보낸다. 그 시절의 묘한 향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연히 방학마다 연구실을 비운다. 연구 질이 하락할 뿐 아니라 우리 대학 교육에 대한 신뢰도 떨어뜨린다. 대학 교육의 핵심인 교수들이, 정작 자신의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공계 이야기가 주가 되다보니 김대식의 역할이 크다. 동생 김두식은 문과의 사례를 보충하거나 형의 주장을 적절히 보완한다. 명쾌한 대화다. 그러나 읽고 나서 한 켠에 씁쓸함도 생긴다. 우선 책에서 말하는 한국 대학의 암담한 현실이 그렇다. 더불어 이 두 학자 형제의 정체성이다. 그들은 각자의 집단에서 다소 아웃사이더에 속하며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런 그들 마저도 한국의 가장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전혀 아니다.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만이 엘리트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그것이 주로 잘 먹히는 풍토)가 문제다.


형은 서울대 물리학과, 버클리대 물리학 박사 등을 거쳐 서른 즈음에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된 사람이다. 동생은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24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다. 어찌 보면 누구나 목 높여 해야 할 비판인데도, 이 정체성은 이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어준다. 예전 강준만이 서울대 해체론을 폈을 때 그 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공격을 받았던 과거가 떠오른다. 콤플렉스 때문 아니냐는 것이었다. 김대식 두식 형제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 아직도 우리 사회가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주장이 더욱 공론화돼 누구나 자유롭게 우리 대학교육과 연구의 개혁에 대해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 시작으로서 이 형제의 노력은 칭찬할 만 하다. 그 밖에도 형제의 성장 과정이나 성격 차이를 다룬 부분도 흥미롭다. 재미 있던 것은 형제의 예민한 방광에 관한 이야기였다. 김두식은 예민한 방광 때문에 화장실에 그냥 자주가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물을 안 먹었다고 한다. 김두식과 달리 김대식은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소변 양을 재서, 성인 평균인 500미리 정도가 될 때까지 참았다는 것이다. 예민깨나 하는 나로서도 한 번 참고할 만한 방법인 듯 하다. 간만에 즐거운, 그러면서도 생각거리를 많이 남기는 책을 읽었다.

사랑의 소리는 울음으로 울려 펴졌다. 늦은 밤에 지나친 집 근처 연못은 개구리 울음 소리로 가득찼다. 울음소리는 곧 짝을 찾는 소리다. 어둠 속에서 분주하게 사랑을 더듬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생명체에게 반복되는 일이다. 유전자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없이도 알아서 터득한다. 신비한 울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지난 봄 성북천에 갔을 때 비둘기의 구애를 봤다. 벚꽃이 막 피던 시기였다. 비둘기의 구애는 그때 처음 목격했다. 그것은 역시 소리로 먼저 들려 왔다. 걷고 있었다. 바람빠지는 듯한 소리에 주위를 둘러봤다.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걸었다. 여전히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그 소리가 비둘기가 내는 것이란 걸 알았다. 마치 배에 가스가 차면 꾸룩꾸룩 소리가 나듯, 그런 소리를 반복하며 수컷이 암컷 주위를 맴돌았다. 암컷은 귀찮다는 듯 계속 자리를 피한다. 그걸 보면서 또 다른 구애의 몸짓을 떠올렸다.


지난해 늦여름에 본 나비들의 몸짓은 비둘기처럼 우악스럽지 않았다. 우아하다. 이 몸짓에는 소리가 없지만 분명하다. 비둘기보다 더 직관적이다. 기품있는 날개짓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속삭인다. 분명 울음이다. 소리는 없지만. 울음은 곧 티를 내는 것이다. 나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비둘기의 구애가 일방적이라면 나비는 쌍방향적이다. 그래선지 나비의 구애가 덜 애처롭다. 


인간의 구애도 결국 울음이다. 겉으로 어떤 모습을 띠든 울음이다. 웃으며 외치든 수줍게 속삭이든간에. 설렘과 불안,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다. 그러다 속으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것은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머문, 표출되지 못한 구애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때로는 말 못해 속에 썩혀둔다. 들리지도 않는 답답한 울음鬱音이다. 괴로움이다. 유독 인간에게만은 구애도, 그 후의 사랑도 괴로움으로 가득한 듯하다. 


라산 롤랜드 커크의 크레올 러브 콜은 이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듀크 엘링턴의 우아한 원곡을 멋지고 기발하게 비틀었다. 원곡의 우아한 소프라노 멜로디에 옆에, 커크는 절규하며 찢어지는 솔로를 덧댔다. 아름다움과 고통이 뒤섞인 묘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 구애에 더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과연 울음은 감당할 만한가.

불가사리는 골칫덩어리다. 괴수 영화 Tremor의 우리나라 제목이 불가사리로 번역된 것을 보면, 사람들의 혐오감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서도 불가사리는 해로운 동물로 분류된다. 어자원을 갈취하는 불량배같은 생물이다. 어민들의 시름을 불러오는 원흉이다.

 

어떤이들은 이 바다 포식자를 식재료로 삼는다. 불가사리 요리를 맛 본 웬만한 이들은 하나같이 손사레를 친다. 불가사리의 맛은 형편없다. 누구든 이 음식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의아의 눈초리를 보낼지 모른다. 그는 미각이 이상하거나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다. 이상한 놈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불가사리가 얼마나 골칫덩어리인지 떠올려보라. 그리고 불가사리 애호가가 그 골칫덩어리를 처치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암적인 것들을 없애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러니 그 이상한 시선을 거두라. 좀 더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불가사리 요리와 함께 즐기도록 내버려두라.

 

그리고 혐오해 마지않던 불가사리 중에서 실제로 위혐적인 종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해양의 청소부라는 것을 알게되면 당신의 생각은 다시 한 번 바뀔 것이다. 게다가 위협적인 극소수의 불가사리마저 해양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되면, 더 이상 불가사리는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작은 호의를 품어 보길 빈다.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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