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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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우산에 올랐다. 버찌가 사방에 널려 있다. 이 놈들이 전혀 반갑지 않다. 특히나 주차장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포장도로에, 길 양쪽 벚나무에서 떨어진 버찌들이 온통 검은 물을 들여 놓았다. 보기에만 안 좋은 거라면 별 신경 안 썼을 테다. 제일 짜증나는 건 이 버찌들이 신발 밑창에 낀다는 점이다. 한 개만 끼어도 '삐긱삐긱' 소리가 나는데, 보통은 여러개가 밑창의 틈새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진하게 익어 찐득해진 과즙 때문에 한 번 붙으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소리만이 아니다. 걷는 데 이물감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신발을 돌 모서리에 비비며 잔뜩 낀 벚들을 떨쳐내려 하지만 소용없다. 본드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뾰족한 나뭇가지로 일일히 빼내야 한다. 몇 개 빼내면 뭐하랴. 그렇게 몇십 미터 올라가면 다시 가득 떨어진 버찌가 눈 앞에 보인다. 그냥 포기하고 걸을 수 밖에.
벚들을 보며 사람들을 생각한다. 널리고 널린 사람들. 이 좁은 중랑구에도 50만 명이 넘게 산다. 너무 많아서 소중하지 않은 것인지. 그저 소중하지 않은데 많기까지 한 건지. 모르겠다. 대부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칠 뿐이다. 그런데도 신발에 낀 벚들 마냥 마음속에 사람들이 걸린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종종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니 꽤 자주. 내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그립다. 고종석의 소설 속 말 처럼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그리워하다보니 싫어진 걸까. 싫음에도 그리운 걸까.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벗은 찾기 힘들까. 벗들은 없고 벚들만 나뒹군다.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항상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내가 마음을 열고 한발짝 다가가면,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고. 사람들이 한 발짝 다가오면 내가 뒤로 물러선다. 문제는 그게 여러번 반복되면, 인간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다는 거다. 귀찮음과 두려움의 상승작용이 벌어지는 것 같다. 내 문제도 분명히 있긴 하다. 내려오는데 좁은 오솔길을 막고 아주머니들이 벚 줍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다른 사람이 앞에 왔는데도 못 알아채고, 길을 가로막고 앉아 있었다. 이미 봉지에 한 가득한 벚들. 내게도 새롭고 소중한 벗들이 찾아 왔으면. 아니 내가 찾아야 하는 거지만.
2. 산딸기를 다시 먹어 봤다. 여전히 단 맛은 없지만, 신 맛은 확연히 강해졌다. 역시 난 익지도 않은 산딸기를 먹었던 것이었다. 충분히 신 산딸기. 산딸기는 그걸로 족하다.
3. 내려오는 길에 음악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산중에 스피커 따위는 없으니. 조금 더 걷고서야 궁금증을 풀었다. 멀리 보이는 벤치에 흰 머리의 노인이 앉아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코디언인지 반도네온인지 확실하지도 않다. 나중에 알아봤지만 두 악기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과연 내가 들은 건 뭐였을까.
노인은 귀에 익은, 이름은 알 수 없는 노래들을 연주했다. 발걸음을 천천히 하며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다 이내 최고조에 달하고 다시 희미해져 가는 걸 들었다. 그리고 노인이 앉은 벤치에서 100미터 쯤 떨어진 다른 벤치에 앉아 들릴락말락한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 봤다. 등산객들의 발소리와 바람소리 사이로 흐릿한 멜로디가 간간히 전해졌다. 그 노인은 과연 누굴까. 왜 거기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냥 나도 바람부는 산 속에서 하모니카나 불고 싶다. 그럴 실력이 없는 게 문제지만.
4. 이번 글은 망글이다. 처음부터 시제가 계속 오락가락 했다.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 의문형 종결어미도 너무 많이 썼다. 확신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다. 인간과 관계, 언제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