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아직 내게서 멀다. 아주 건강하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딱히 앓는 병도 없다. 내 부모는 몇 년 뒷면 노년의 초에 접어들지만, 요새 평균수명에 비하면 아직 한참 젊다. 수명에 큰 영향을 끼칠 중병을 앓는 가족도 없다. 내가 다녀왔던 장례식은 모두, 먼 친척 혹은 먼 친척의 아는 사람들의 장례식이었다. 물론 그곳에서 전해오는 진한 슬픔은 내게도 적잖은 감정의 동요를 불러온다. 그것은 일시적이다. 세상이 바뀔 만 한 충격이나 슬픔을 느끼지는 못한다. 죽음은 아직 나와 멀게 느껴진다.

 

내가 겪은 죽음들은 모두 간접적이다. 쓰고 보니 하나마나 한 말이란 걸 깨달았다. 직접적 죽음은 그걸로 끝이니.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죽음은 간접적이겠지만, 그 중에서 더 가깝거나 먼 것이 있다. 살을 맞대고 사는 가족의 죽음이라면 더 직접적이라 느낄 테고(그래도 여전히 간접적인 경험에 불과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멀게 느껴질 것이다. 아니다. 살을 맞대는 원수들도 많다. 결국 정서적 거리의 가까움이 한 개인이 느끼는 죽음의 파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례식의 풍경은 묘하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다. 물론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다 해도 물리적으로 그는 세상에 없다. 그런 단절의 순간이 다른 사람들의 만남의 시간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정서적 만남의 시간이며,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주변인을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개 그 만남에서 내가 느끼는 것들은 비슷하다. 나는 그들을 정말 몰랐구나. 나와 그들의 고리는 정말 허약했구나.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

 

작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수록된 여름날은 간다라는 시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이라는 구절이 특히 강렬하다. 죽음은 결국 이별의 극단적 형태다. 그래서 이 시는 모든 만남과 이별에 관해 노래하는 시다. 적으나마 내가 만나온 사람들,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제대로 기억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얼마나 제대로 알았을까. 자신이 없다.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모자랄 판에, 울어본 적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마음을 벌리고 틈을 냈어야 했다. 시간이 모자랐던 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스며들 사이가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음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대부분 그랬다는 게. 그것이 아프다. 좀 아프더라도 틈을 냈어야 했다저절로 벌어지는 일은 드무니까.

 

여전히 여름날은 가고 있다. 무덥지만 서늘한 여름날이

아직 영원한 이별의 순간은 아득하다. 

이별할 땐 사람들과 나눈 틈을, 그 스며듦의 순간을 조금 기억할 수 있기를.

내가 

또 누군가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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