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도서관 신착도서 코너에서 책을 빌린다. 생각지 못한 좋은 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도서관에 들렀을 때도 신착도서 코너를 유심히 보곤 한다. 에릭 호퍼의 <영혼의 연금술>은 그렇게 빌린 책이다. 에릭 호퍼라는 인상적인 이름 때문에, 그리고 연주황의 깔끔한 책 디자인 때문에 서가에서 꺼내 보게 됐다. 짧은 것은 두 세문장에서 긴 것은 한 페이지 분량으로 된 잠언 모음집이었다.
처음엔 그저그런 자기계발서인가 했다. 그러나 짧은 문구들을 몇 개 읽어나가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가장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도, 가장 둔감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큼도 자신을 관찰하지 못한다." 같은 매혹적인 문장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에릭 호퍼란 이름을 두고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교양수업에서 알게 된 에드워드 호퍼, 빛의 인상적 사용이 돋보이는 화가라는 설명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에드워드 호퍼 전기도 빌렸지만, 천 쪽을 훨씬 넘기는 분량에 압도당해 3주 동안 책 속 그림만 구경하고 반납했던 흑역사도. 아무튼 몇 초의 시간동안 둘을 헷갈리지 않았다면 이 책을 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식함, 어설픔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하다.
짧은 문장은 대개 위험성을 갖는다. 마치 오늘의 운세 마냥,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명 코걸이 식으로 제 멋대로 해석하기 쉽다. 근거를 부연할 뒷 문장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이 확신에 차 있다면 더 위험하다. 그저 편견에서 나온 고집스러운 문장으로 끝나기 쉽다. 책을 여러본 다시 본 결과, 이 책의 문구들은 그런 위험성을 대체로 빗겨간다, 고 조심스레 말해본다. 결코 쉽게 써낸 문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검색결과 이 사람은 거리의 철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써냈다 한다. 그런 배경이 좀 더 책을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아마도 내게 깊이 내재된 철학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비교적)쉽고 직관적으로 인간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도 더러 있지만.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진정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존심을 얻을 수 없는 경우. 시기하는 마음이 욕망 대신 들어선다.- p142
-우리가 영향을 주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그 정도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p152
-다른 사람을 기꺼이 칭찬하는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 꺼리는 사람은 상대방의 칭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결국 영혼의 그릇이 작을수록 감언이설에 넘어가기 쉽다. p161
-다른 사람의 평가가 그다지 많이 신경쓰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견해에 관대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갈망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중요성이 두렵지 않다. 두려움과 옹졸함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p162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은 충동은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할 때 가장 강해진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좀처럼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p163
- 누구가에게 동의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증오할 기회가 많음을 의미한다.-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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