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고종석의 추천을 보고 무작정 빌린 시집이다(그는 이 블로그 속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한 작가일 게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에 관심을 두었던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내 나름대로 시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인열전>이란 시평집도 산 적이 있는 걸 보면(이 책은 곰팡이 슬다 만 상태로 아직도 책꽂이에 있다). 그러나 여러 문제(입시 스트레스, 체력 저하 등)로 인해 시에 대한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 시 공부를 하며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서정주의 자화상이나 김수영의 풀 같은 시를 읽으며 전율하기도 했다. 한편 시어 하나하나 밑줄을 긋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석하라는 교사들의 말에는 반감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약하게 존재하던 시를 향한 관심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대학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구렸고, 재미없었다(이걸 다 설명하면 글이 삼천포로 흐르니). 물론 그게 꼭 대학 문제는 아니다. 내 문제도 있었을 거다. 어쨌든 나는 대학에 스며들 수 없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대학은 낯선 장소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학에 대한 내 관심은 사라졌다. 먹고사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부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몇 달 전 누군가가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추천 해 줬다. 그러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동대문도서관 신간 코너에 고이 꽂힌 그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작년 말에 출간된 책이 아직도 구김하나 없는 상태로 모셔져 있었다. 사람들이 시를 안 읽긴 정말 안 읽나보다, 생각했다. 그 시집은 첫 시작부터 강렬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첫 시 제목이다.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 감춰진 의미를 찾는 것. 그게 문학의 역할(힘?)인 듯 하다. 그 점에서 그 시는 나를 일깨웠다. 어려운 시도 많았지만 읽을수록 마음속으로 무겁게 잠기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결국 책도 잘 안 사는 놈이 시집을 사게 만들었다. 그러다 고종석의 직문직답 강연에 가서, 시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더욱 상승했다. 그가 추천한 황인숙의 시집들을 검색해봤다. 중랑도서관에도 꽤 있었다. 무작정 가서 이 시집<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빌렸다.
이 책은 이제 오십대 중반에 이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란다. 그의 시는, 비슷한 시기에 빌린 젊은 작가들의 시집에 비해서는 훨씬 쉬이 읽힌다. 그렇지만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다. 누구나 느낄만한 인생의 고민, 생활 속의 발견을 발랄하게(이 표현을 여럿이 쓰던데, 정말 딱 맞는 듯하다)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 발랄함은 10대 소녀의 발랄함은 아니고, 좀 더 성숙한, 무게 있는 발랄함인 것 같다.
수십 편의 시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웃음소리에 깨어나리라/산오름/장마/그 참 견고한 외계/지붕위에서/낮잠/여름 저녁/골목쟁이/알 수 없어요/아무도 아닌 사람/패배자들의 가능세계
같은 시들이었다.
그 중 가장 따스하면서 재치있는 시는 '지붕 위에서'다.
'지붕 위에서' - 황인숙
기와지붕, 슬레이트지붕, 콘크리트 지붕, 천막으로 덮인 지붕
굽이굽이 지붕들의 구릉과 평원을 굽어본다
지붕들이 품고있을 크레바스와 동굴들, 겹과 틈까지
샅샅이 굽어본다
와우, 저 지붕을 쫘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 견적을 뽑는데
은빛 천막 위에서 몸을 쭉 뻗고
일광욕을 즐기던 고양이가 예감이 이상한 듯
고개를 들어 둘러보다 나를 향해 얼굴을 멈춘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걱정마시라, 네 영역을 공유하기에
내 몸은 너무 무거우니까
저 공중 공간의 활용자인 고양이들
고양이의 몸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고양이를 위로 위로 올려보내서
광할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
아드레날린 중독자인 고양이들이여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
말하자며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사이이의 허공에
너희는 환장을 하지
그래서 마치 지붕들이 고양이를 낳는 듯
불쑥불쑥 고양이가 지붕위로 솟는 것이다
지붕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화자는 각양각색의 지붕들이 보이는 높은 곳에 사는 듯하다. '지붕을 쫘악 펼치면 지상을 몇 번이나 덮을까'란 표현 참 발랄하다. 그렇게 잡상을 떠올리며 무심하게 흘릴 풍경에서 그는 고양이를 발견한다. 고양이를 향한 화자의 따스한 마음이 펼쳐진다. 너를 해할, 괴롭힐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 그리고 이어지는 고양이 찬가. 글을 따라가다 보면 위태로운 지붕위 공간이 전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화자는 고양이의 공간을 방해하는 대신 감탄으로 그친다. 마지막 행이 재미있다. '지붕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뒤안길과 위안길이란 언어유희가 더해져 시는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읽는 내 마음 온도도 같이 상승한다.
시가 더 읽고 싶어지는 여름이다. 시를 무용한 '말의 타래'로 여겼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웃기다. 힘과 위로가 될 것들은 항상 근처에 있었는데, 찾지 못했던 지난한 날들이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읽을거리 걱정은 없을 듯하다. 기분이 좋다. 내게 한강의 시집을 추천했던 그는, 아마 별 생각없이 지나가는 말로 그랬겠지. 그런 하찮은 말이 큰 기회를 열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그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내게 이런 우연의 기쁨을 열어준 것은 굉장히 고맙다. 그에게도 행복한 우연이 가득하기를(그를 다시 볼 일이 없을테니, 무리한 부탁으로 귀찮게 했던 점도 같이 사죄하는 의미에서).
'읽은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사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입 속의 검은 잎>,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0) | 2014.08.05 |
---|---|
아룬다티 로이, <생존의 비용> - '공공의 더 큰 이익' (0) | 2014.07.28 |
<고종석의 문장> (0) | 2014.07.21 |
<영혼의 연금술> - 에릭 호퍼 (0) | 2014.07.09 |
이제는 누군가 해야할 이야기 (0) | 2014.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