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홀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대개 그 대상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랑 상대(이성이건 동성이건)인 경우가 많다.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예술작품일수도 있다. 혹은 칸막이 속 활자의 연속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말할 경험이다. 당시는 2004, 어쩌다 보니 딱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대입 논술시험을 대비한답시고 신문을 스크랩하던 고등학생은 사진 속 한국일보 칼럼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건 아름다움이었다. 글은 강하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따스함을 내뿜고 있었다. 고종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됐다. 그전에도 그의 글을 조금씩 읽었지만 이 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중학생 때까지 주로 대중 소설을 좋아했던 내게 사회적 시의성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글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뒤로 10년 동안 내 관심사는 꾸준히 변했지만, 고종석 글에 대한 관심은 멈추지 않았다. 인생의 순간순간 기자의 삶을 상상해보게 만든 것도 이 사람이다. 물론 스스로 기자의 깜냥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지만. 여전히 글로 세상을 조금 변화시킬 수 있을까하는, 헛된 꿈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 때마다 본디 회의적인 나는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쉽게 결론 내리곤 한다. 하여 글 잘 쓰는 사람이라도 되는 게 더 현실적인 목표다. 작년 늦가을 쯤 했던 고종석의 글쓰기 강좌를 꼭 들으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러 사정으로 듣지 못했지만, 강좌가 곧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안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지나 올 6월에야 출간됐다.

 

글을 잘 쓰려는 욕망이 있기에 이런저런 글쓰기 책을 많이 찾아봤다. 특히 최근엔 글쓰기 책이 많이 출간됐다. 자연스레 무엇을 봐야할지 헷갈린다. 서점과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찾아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은 많지 않았다. 지금껏 가장 좋았던 건 조셉 윌리엄스와 그레고리 콜럼이 지은 <논증의 탄생>이었다. 논증의 기초부터 실제 적용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단 논쟁적 글쓰기(Argumentative Essay)에 한정돼, 보다 자유로운 작문은 다루지 않는 게 아쉬웠다. 이 책 말고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도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많은 인용을 통해 다양한 좋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고 있다. 미국인 작가라 영미권의 글만 소개한 건 아쉽지만. 그 밖에 책들은 괜찮은 것이 드물었다. 내용이 대부분 비슷하고 글쓰기의 실제적 내용은 소홀하게 다루는 것들이 많았다.

 

그 점에서 이 책 <고종석의 문장>은 독특함을 지닌다. 먼저 저자가 그간 여러 장르의 글쓰기로 평단과 독자의 인정을 받아온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저자의 이름이 책의 우수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같이 그의 글을 오래 읽고 신뢰해 온 사람에게는 선택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으레 좋은 글에 대해 할 말이 많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니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보면 이 책과 그 바탕이 된 강의는 여러 특징을 갖는다. 우선 다른 글쓰기 강의와는 달리 교양을 매우 강조하는 점이다. 그건 글의 재료가 될 사회 여러 분야의 교양 뿐 아니라 실제 문장을 짓는 데 도움이 될 언어학 교양도 포함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뻗어나갈 가지가 많다. 그가 언급한 책들을 읽어볼 수도 있고, 그가 예시로 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조사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글을 쓰기 위한 지식이 서서히 쌓여 갈 것이다. 또 글의 색깔을 풍성하게 할 조언을 얻을 수도 있다.

 

저자가 자신의 저서 <자유의 무늬>를 직접 교재삼아, 글다듬기의 여러 팁을 보여주는 것이 다른 차별점이다. 대체로 자신의 옛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많다. 출간한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티가 많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비판을 통해 좋은 문장, 좋은 글의 조건을 제시한 점은 이 책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 이로써 독자는 문장을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나도 막연히 그의 문장에 흠잡을 게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작가의 이름값에 대한 막연한 맹신을 버리고, 의심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점이 이 책 서술 방식(그 바탕이 된 강의 진행 방식)의 미덕이다. 대체로 저자는 더 자연스럽고 쉬이 읽히는 쪽으로 문장을 고친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돼 있고, 각 장의 큰 주제는 글을 왜 쓰는가’,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인터넷 글쓰기’, ‘아름다운 한국어 어휘등이다. 또 각 장은 글쓰기에 대한 여러 교양 지식을 알려주는 부분, 글쓰기 이론 부분, 이를 바탕으로 <자유의 무늬>를 분석하는 글쓰기 실전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내용들은 상당수 저자의 옛 저서들에 다뤘던 내용이다. 그래서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책이 강의를 바탕으로 한 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다만 책 내용이 주로 단어와 문장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쉬웠다. 앞의 글쓰기 목적이나 교양 언어 지식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저자의 탐구범위가 문장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는다(제목이 고종석의 문장인 이유가 그 때문일까). 아무래도 이 책이 두 권으로 예정된 시리즈의 앞 권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보다 큰 차원에서 문단내의 문장의 배치나 글의 흐름을 짜는 전략 등에 매우 관심이 많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중요한 것처럼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도 중요할 테다. 또 본문의 배치나 서술 방식에 따라서 글의 결도 완전히 변한다. 2권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기를 기대한다.

 

사소한 지적

 

글쓰기 실전, 88페이지의 예시와 149페이지의 예시가 겹친다.

160페이지의 두 번째 줄, ‘1900년대 말은 문맥상 ‘1800년대 말이 맞아 보인다. 편집자가 그 윗줄 ‘19세기 말이라는 표현과 헷갈린 듯싶다.

 

사실 이 책은 힐링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압도적 부분이 재능보다 훈련에 달렸다.” 이 문장 말이다. 요새 글쓰기로 골머리를 앓는 내게 이보다 더 반가운 문장은 없다. 학창 시절 내내 글쓰기를 두려워했다는 그의 고백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믿어도 될 듯하다. 이제 다시 연습할 일만 남았다.

책 만드는 게 일이다보니, 저자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그러면서 글과 사람의 차이에 대해 자주 놀란다. 아니 처음에 자주 놀랐다. 이젠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써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실망하게 된다.”

 

고종석의 장편 소설 <해피 패밀리>에 나오는 지문이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특히 독자를 상정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 더욱 들어맞는 내용이다. 자기 노출은 곧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런 구석진 블로그에서, 얼굴모를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기검열을 하고 있으니. 작가가 아무리 균형을 갖고 자신을 표현하려 한들 그것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기 보호본능과 이런저런 편견은 글과 작가의 사이를 계속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직접 내뱉은 작가는 과연 얼마나 반할만한 혹은 실망한 만한 사람일까.

 

7117시 반,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고종석의 직문직답이 열렸다. 글쓰기 책 <고종석의 직문직답> 출판 기념한 질답 시간이었다. 직접 만난(목격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고종석은 솔직하고 격식 없는 사람이었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목소리는 생각 밖. 깔리는 중저음을 예상했건만). 예상외로 상당히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한 이야기를 직접 꺼내며, 자신은 사람이 더 아름다우니 여러분은 복 받은 거라며 농쳤다. 딱딱한 직문직답의 분위기를 해소시켜 주었다. 이 밖에도 중간 중간 사소한 유머로 분위기를 전환하곤 했다.

 

직문직답은 독자들의 질문과 고종석의 답변으로 이뤄졌다. 대부분의 질문과 답변은 책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한 지식을 얻지는 못했지만, 글로만 만나던 작가를 직접 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상파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오기도 했다. 벌써 일주일이 됐는데 방송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날 그의 글이나 직문직답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실망을 하긴 했지만, 이건 프라이버시 문제니 말하는 게 낫겠다. 그저 그도 무심한 중년남성이라는 걸 확인했다고 할까.

 

자세한 직문직답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거칠게 정리한 것이고, 말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남성 작가들은 여성편력을 픽션이나 수필 형식으로 작품에 푸는데, 고종석 작가는 부인이나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용납이 되나?

 

그런 시도를 한 적 거의 없음. 다만 사랑이 문학, 근본적으로 예술의 질료가 되는 건 아주 보편적인 것. 다양한 사랑의 방식(동성애, 근친상간 등)이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인정해야 함.

 

-비판은 중립적이어야 하나?

 

비판과 중립은 모순. 사실 왜곡날조가 아니라면 한 쪽 편을 드는 건 당연. 비판은 정파적, 당파적일 수밖에. 난 소수자의 편에 서서 글을 써 옴. 소수는 양 개념이 아닌 질적 개념(남성과 여성, 자본가와 노동자의 예를 들며). 대표적으로 장애인, 동성애자, 전라도 사람, 선천적 조건으로 소수가 되는 사람들. 편들지 않는 것은 묘사에 불과. 글 쓰는 사람이 소수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건 문제. 작가기자는 소수자 편이어야.

 

동성애 축제에 대한 비판 존재(굶어죽는 사람 등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개인. 어떤 개인에게는 자기의 국적, 성별, 빈부라는 정체성보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강할 수 있음. 그것을 존중해야 함. 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자로서 소수자를 옹호할 수밖에.

세월호 사건. 관련자는 아주 소수지만, 그들은 사건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한 것. 한 사람의 삶은 우주와 같다. 집단이 아닌 개별자로 보는 게 중요.

 

-아름다운 글은 어떻게 쓰나

 

굉장히 어려운 질문. 아름다움을 정의하긴 어려우나 누구나 느낄 수 있음. 글은 논리와 수사로 구성. 좋은 글을 쓰는 데는 논리가 더 중요. 논리는 명료함에 기여, 수사는 아름다음에 기여. 수사는 곧 비유이고, 비유는 크게 은유와 환유로 나뉨. 은유는 사물의 유사성을, 환유는 인접성에서 비유를 끌어옴. 은유-조지훈의 승무(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환유-청와대는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청와대는 건물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또는 측근을 비유.

 

+본인의 가장 아름다운 글은?

 

<사랑의 말들, 말들의 사랑> 수사가 가장 적절하게 들어갔다고 생각.

나는 미적 자본 거의 없음. 보상심리에서 글이라도 아름답게 써야겠다고 생각.

 

-진심이 담긴 글, 나에 대해 아는 게 중요한데. 일기를 쓰는 편. 작가는 자신을 알기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일기는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수단.

대개 좋은, 아름다운 글을 쓴 저자를 만나보면 실망하기 마련. 글쓰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 누구나 자기애가 있고 글에 드러나기 마련. 글쓰기는 자기미화를 필연적 포함. 글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출판사에선 단정적 표현 요구. 자신은 모호한 문장 선호. 차이점?

 

비평적 글에서 필자의 확신을 드러내는 건 선택의 문제. 글 쓰는 사람은 회의주의자가 돼야. 자신도 ‘~듯하다, 싶다표현을 자주 쓰는 편. 독자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는 게 바람직. 정치적 글일수록 지지자를 끌어내기 위해 확신이 강함. 좋은 비평을 하고 싶다면 확신은 금물. 나라면 출판사와 싸우겠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원칙이 충돌할 때?

 

, 등의 표현은 일본식 표현. 없어도 자연스러우면 빼는 게 한국어답다. 단 표준 한국어 문장에만 얽매이면 글이 밋밋해짐. 문장의 다채로움, 문체를 위해서는 자잘한 표현보다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스타일을 만들려는 욕망을 가져야.

 

-필사가 도움이 되나?

나라면 하지 않을 것. 좋은 글, 아름다운 글을 되풀이해서 읽는 게 낫다. 비판적으로 읽으며, 표현을 따져보거나 바꿔보는 방법으로

 

-문학의 유용성?

장 폴 사르트르의 신소설 비판. 세부묘사 집착, 비정치성. ‘구토비판을 통해 신소설 간접적 비판. 장 리카르두의 반박 문학은 굶어죽는 아이를 살리진 못하지만, 굶어죽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추문(스캔들)로 만든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진 못 하지만, 인간성을 지켜주는 역할.

 

-군더더기 없이 글 쓰는 방법?

한 번에 많은 이야기를 담지 말 것. 예를 들어 문단의 경우, 한 문장을 빼도 뜻이 통하면(정보량이 같다면) 빼 버릴 것. 문장의 경우도 품사를 빼고 말이 통하면 (되도록) 뺄 것.

 

-소재 발굴?

시사적인 글의 경우. 인터넷을 뒤져 보는 것. 외국어 사이트도. 중요한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이 안 썼다면 글을 씀.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쓴 글은 없음.

기자 시절 취재나 경험을 다시 돌아보기도 함.

친구만나서 수다 떨거나, 술을 마시다 떠오르기도 함.

 

-고심해서 쓴 문장, 단어에 미련 남을 때 어떻게?

내 경우 빼서 더 좋아지는 경우가 많음. 분량 제한 있는 글 연습이 글쓰기 향상에 도움. 예를 들어 1600자 기준 등. 제한이 있으면 빼야 할 문장, 단어에 대해 고심하게 됨.

 

-평범한 직장인 소설 쓰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음. 소재만 생각하고 발전이 잘 안되는데, 글을 잘 풀어내는 방법은? + 문체는 간결체? 만연체?

 

컴퓨터 앞에서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간결해서 아름다운 문장, 길고 늘어져도 아름다운 문장 존재. 정답은 없음.

 

-본인의 성격이 글쓰기에 영향? 작가의 글쓰기의 동력은?

글쓰기는 노력. 에디슨의 말은 천재의 거짓말. 모든 뛰어남은 어느 정도 타고남. 특히 음악과 수학. 글은 예외. 나도 학창시절 글을 못 썼음. 우연히 첫 직장이 신문사가 되면서 글쓰기 시작. 다만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된 듯. 좋은 글을 많이 되풀이해서 읽어야 함. 물론 좋은 글의 기준도 많이 읽어야 형성.

 

누구의 글이든 비판적으로 읽을 것. 권위에 가리면 안 됨. 사르트르는 사물의 언어, 도구의 언어를 구분. 시는 사물의 언어라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 그러나 프랑스의 혁명시나 한국 독재 시절의 시처럼 반례가 많음. 사르트르의 말은 당시엔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비판받아 마땅. 아무리 권위를 지닌 작가라도 의심하고 비판해야 함.

글쓰기 원동력은 월급!

 

-트윗을 하기에 능력이 아깝지 않나?

절필하고 소통수단으로 여김

 

-보편적 글쓰기 교육이 가능한가?

가능하고 필요하다. 글쓰기는 타고나는 게 아니기에. 현대는 누구나 글 쓸 수 있는, 글쓰기의 민주화 시대. 모든 사람이 저자이자 독자. 그래서 쓰기 교육, 그리고 읽기 교육 중요

 

-언어학 공부가 글쓰기에 영향을 주는지?

공부 전후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

 

-칼럼, 에세이, 소설을 쓸 때 마음가짐 차이가 있나? 시를 좋아하나?

주문생산! 글 쓸 때 장르를 따지지 않음. 태도의 차이도 없음.

한국어다운 글을 쓰고 싶다면, 모국어의 밑동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시를 읽을 것. 산문을 쓰고 싶더라도 마찬가지. 시에는 시인의 단어 선택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음. 어느 언어의 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시는 결국 (시 본래의 형태인)가사의 형태로 살아남을 것으로 전망. 다른 나라의 추세 등을 볼 때.

 

-추천할 시인, 시집은?

가장 아름다운 시집은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이라고 생각. 화사집의 시를 읽고 전혀 감흥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

더불어 절친 황인숙의 시집들 추천.

 

-작가가 되고 싶은데, 문예창작과에 가야 하나?

작가가 되는 기본은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 문예창작과는 확실히 도움된다고 생각. 자신도 더 일찍 창작에 뜻을 뒀다면 문창과에 갔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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