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거리

<고종석의 문장>

잡식하마 2014. 7. 21. 23:29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홀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대개 그 대상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랑 상대(이성이건 동성이건)인 경우가 많다.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예술작품일수도 있다. 혹은 칸막이 속 활자의 연속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말할 경험이다. 당시는 2004, 어쩌다 보니 딱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대입 논술시험을 대비한답시고 신문을 스크랩하던 고등학생은 사진 속 한국일보 칼럼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건 아름다움이었다. 글은 강하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따스함을 내뿜고 있었다. 고종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됐다. 그전에도 그의 글을 조금씩 읽었지만 이 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중학생 때까지 주로 대중 소설을 좋아했던 내게 사회적 시의성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글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뒤로 10년 동안 내 관심사는 꾸준히 변했지만, 고종석 글에 대한 관심은 멈추지 않았다. 인생의 순간순간 기자의 삶을 상상해보게 만든 것도 이 사람이다. 물론 스스로 기자의 깜냥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지만. 여전히 글로 세상을 조금 변화시킬 수 있을까하는, 헛된 꿈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 때마다 본디 회의적인 나는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쉽게 결론 내리곤 한다. 하여 글 잘 쓰는 사람이라도 되는 게 더 현실적인 목표다. 작년 늦가을 쯤 했던 고종석의 글쓰기 강좌를 꼭 들으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러 사정으로 듣지 못했지만, 강좌가 곧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안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지나 올 6월에야 출간됐다.

 

글을 잘 쓰려는 욕망이 있기에 이런저런 글쓰기 책을 많이 찾아봤다. 특히 최근엔 글쓰기 책이 많이 출간됐다. 자연스레 무엇을 봐야할지 헷갈린다. 서점과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찾아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은 많지 않았다. 지금껏 가장 좋았던 건 조셉 윌리엄스와 그레고리 콜럼이 지은 <논증의 탄생>이었다. 논증의 기초부터 실제 적용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단 논쟁적 글쓰기(Argumentative Essay)에 한정돼, 보다 자유로운 작문은 다루지 않는 게 아쉬웠다. 이 책 말고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도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많은 인용을 통해 다양한 좋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고 있다. 미국인 작가라 영미권의 글만 소개한 건 아쉽지만. 그 밖에 책들은 괜찮은 것이 드물었다. 내용이 대부분 비슷하고 글쓰기의 실제적 내용은 소홀하게 다루는 것들이 많았다.

 

그 점에서 이 책 <고종석의 문장>은 독특함을 지닌다. 먼저 저자가 그간 여러 장르의 글쓰기로 평단과 독자의 인정을 받아온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저자의 이름이 책의 우수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같이 그의 글을 오래 읽고 신뢰해 온 사람에게는 선택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으레 좋은 글에 대해 할 말이 많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니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보면 이 책과 그 바탕이 된 강의는 여러 특징을 갖는다. 우선 다른 글쓰기 강의와는 달리 교양을 매우 강조하는 점이다. 그건 글의 재료가 될 사회 여러 분야의 교양 뿐 아니라 실제 문장을 짓는 데 도움이 될 언어학 교양도 포함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뻗어나갈 가지가 많다. 그가 언급한 책들을 읽어볼 수도 있고, 그가 예시로 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조사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글을 쓰기 위한 지식이 서서히 쌓여 갈 것이다. 또 글의 색깔을 풍성하게 할 조언을 얻을 수도 있다.

 

저자가 자신의 저서 <자유의 무늬>를 직접 교재삼아, 글다듬기의 여러 팁을 보여주는 것이 다른 차별점이다. 대체로 자신의 옛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많다. 출간한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티가 많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비판을 통해 좋은 문장, 좋은 글의 조건을 제시한 점은 이 책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 이로써 독자는 문장을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나도 막연히 그의 문장에 흠잡을 게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작가의 이름값에 대한 막연한 맹신을 버리고, 의심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점이 이 책 서술 방식(그 바탕이 된 강의 진행 방식)의 미덕이다. 대체로 저자는 더 자연스럽고 쉬이 읽히는 쪽으로 문장을 고친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돼 있고, 각 장의 큰 주제는 글을 왜 쓰는가’,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인터넷 글쓰기’, ‘아름다운 한국어 어휘등이다. 또 각 장은 글쓰기에 대한 여러 교양 지식을 알려주는 부분, 글쓰기 이론 부분, 이를 바탕으로 <자유의 무늬>를 분석하는 글쓰기 실전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내용들은 상당수 저자의 옛 저서들에 다뤘던 내용이다. 그래서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책이 강의를 바탕으로 한 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다만 책 내용이 주로 단어와 문장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쉬웠다. 앞의 글쓰기 목적이나 교양 언어 지식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저자의 탐구범위가 문장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는다(제목이 고종석의 문장인 이유가 그 때문일까). 아무래도 이 책이 두 권으로 예정된 시리즈의 앞 권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보다 큰 차원에서 문단내의 문장의 배치나 글의 흐름을 짜는 전략 등에 매우 관심이 많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중요한 것처럼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도 중요할 테다. 또 본문의 배치나 서술 방식에 따라서 글의 결도 완전히 변한다. 2권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기를 기대한다.

 

사소한 지적

 

글쓰기 실전, 88페이지의 예시와 149페이지의 예시가 겹친다.

160페이지의 두 번째 줄, ‘1900년대 말은 문맥상 ‘1800년대 말이 맞아 보인다. 편집자가 그 윗줄 ‘19세기 말이라는 표현과 헷갈린 듯싶다.

 

사실 이 책은 힐링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압도적 부분이 재능보다 훈련에 달렸다.” 이 문장 말이다. 요새 글쓰기로 골머리를 앓는 내게 이보다 더 반가운 문장은 없다. 학창 시절 내내 글쓰기를 두려워했다는 그의 고백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믿어도 될 듯하다. 이제 다시 연습할 일만 남았다.